쌀이 모자라던 시절에 자란 세대들은 아까운 게 많다. 밥을 버리면 안되는 건 물론 비누와 치약 등도 끝까지 안 쓰고 함부로 내던지면 큰일 나는 줄 안다. 종이 홍수 속에 살면서도 빈 상자나 한번 쓴 봉투 등을 못 버리고 구석구석 쌓아둔다. 딱히 쓸 데가 없어도 아까워서 내놓지 못하는 것이다. 달력도 그렇다. 종이가 귀하던 종래 달력은 연말연시 소중한 선물 중 하나였다. 세모가 되면 직장인들은 이웃에 나눠줄 달력을 구하느라 기웃거리고,국회의원들은 지역구민들에게 돌릴 달력을 구하느라 동분서주했다. 근사한 그림이나 사진이 담긴 12장짜리나 귀금속점에서 만들던 일력은 가치가 더했다. 12장짜리는 종이도 더 좋아 교과서 덮개 등 쓸 데가 많고,일력은 일진이 적힌 데다 얇아서 화장지로 쓰기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이다. 달력의 용도는 다양했다. 생일과 제사 등 집안의 기념일을 표시하고,전화번호도 메모하고,돈을 빌려주거나 받은 날짜,공과금 수납일도 적어 넣었다. 수첩과 가계부 일기장의 역할을 모두 했던 셈이다. 하지만 종이가 넘쳐나면서 달력의 효용은 뚝 떨어졌다. 기업체에서 배포하는 일반 달력은 말할 것도 없고 학교와 교회 등에서 연간 일정을 적어 넣은 달력을 나눠줘도 별로 반가워하지 않는다. 결국 달력을 제작하지 않거나 전통적인 벽걸이보다 탁상용 쪽으로 형태를 바꿔 만드는 곳들이 늘어난다. 그래도 은행권에선 한번 걸면 1년 동안 떼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음식점이나 상가에 자기네 달력이 걸리도록 하기 위해 애쓴다고 한다. 홍보용으로 더 없이 좋다는 생각에서일 것이다. 만드는 입장만 그러랴.뭐든 흔해지면 값이 떨어지지만 계획을 세우고 점검하는 데 달력만한 것도 없다. 한 장 남은 달력이 쓸쓸하다.지나간 세월이야 어쩔 수 없다 쳐도 다가오는 날들을 알차게 만들자면 시간을 잘 관리하고 작정한 일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새해엔 눈 뜨면 보이는 곳에 달력을 걸어놓고 주간과 월간 목표를 챙기면서 자신을 채근해보면 어떨까. 때로는 낡은 듯한 방식이 최선일 수도 있다. 박성희 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