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협 < 한국생산기술연구원장 keykim@kitech.re.kr > 유통업체들이 '성탄 마케팅'을 시작하고, 할인점들은 각종 이벤트와 크리스마스 행사준비에 돌입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자연산 송이니 초경량 골프세트니 해서, 'VVIP(Very Very Important Person)'에게만 판매한다는 초호화 선물세트 목록도 나돈다. 가뜩이나 힘겨운 서민들로서는 힘이 빠지는 소식일 수밖에 없다. 국내 모 백화점이 우리나라 최초로 '선물세트'라는 것을 내놓은 건 1965년의 일이었다. 지금 보면 라면 한 상자, 설탕 한 부대, 빨래비누 세트, 다리미 등의 선물 목록이 우스울 정도로 소박해 보인다. 하지만 당시로서는 상류층만이 받을 수 있는 호사스런 상품이었다. '먹는 게 남는 것'이라는 믿음은 70년대까지도 이어져,조미료세트와 과자세트가 최고 인기 품목에 오르기도 했다. 이만한 선물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도 극히 드물었다. 나라는 공업화를 향한 질주를 시작했지만,공산품은 그 값이 얼마이건 귀하고도 귀했다. 어느 집을 가나 은박지 씌운 세숫비누,해진 옷으로 만든 걸레,달력으로 싼 교과서,볼펜을 잘라 끼운 몽당연필을 흔히 볼 수 있었다. 명품 핸드백이 다 뭔가. 여인들은 결혼 때 구입한 핸드백이 닳을까봐 장롱 속에만 모셔두고,아이들은 신문지를 접어 만든 종이 핸드백을 가지고 놀았다. 따지고 보면 '오늘'이야말로 '어제'의 선물이다. '현재의'를 뜻하는 단어 Present가 '선물'이란 의미로 쓰이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어렵던 시절에는 연말연시는커녕 가족들의 생일 챙기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그래도 아버지가 생일을 기억해주지 않는다고 해서 부정(父情)을 의심하는 자식은 없었다. 특정한 날을 정해 기념하지 않고도 나날의 삶은 생생했고,오고가는 선물 없이도 가족들 간의 정은 두터웠다. 대부분의 자녀들이 헐벗지 않고 학교에 다닐 수 있는 모든 '오늘'을 부모로부터의 소중한 선물로 여겼기 때문이다. 선물의 가짓수가 늘어난 것과 비례해 감동과 소통은 줄어들고 있으니 기이한 노릇이다. 어쩌면 현대인들의 선물 강박증은 점차 사라져 가는 것들,이를테면 대화·인정·여유 따위 필수영양소를 보충하기 위한 일종의 폭식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소비가 미덕인 시대이기는 하나,과유불급의 교훈을 새길 필요가 있다. 선물은 '나'를 위한 것일 때가 많다. 상대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 역시도 행복을 맛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부담을 느끼게 될 정도의 규모라면 그것은 더 이상 선물이 아니다. 이번 연말연시는 가족 간,친지 간,직장동료 간에 서로서로 정을 나눌 수 있는 소박한 선물들이 오고갔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