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여록] 협상의 두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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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생산 6위국으로 생산량의 80%를 수출하고 위성DMB(이동 멀티미디어 방송)를 세계 최초로 상용화한 나라가 개발도상국입니까?"
외교통상부 간부들이 해외에서 농업 관련 협상을 할 때마다 듣는 얘기다.
한국이 농산물 협상에서 개도국 지위를 인정해달라는 요구에 대한 일종의 빈정거림이다.
개도국 지위를 얻으면 광범위한 예외를 인정받아 농산물의 관세를 어느 정도 유지할 수 있다.
13일 도하개발아젠다(DDA) 협상을 위한 WTO 각료회의가 개막된 홍콩에서도 분위기는 마찬가지였다.
한국이 처한 이 같은 딜레마는 정책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농산물 수입개방 폭은 최소한으로 줄여달라는 입장인 반면 공산품과 서비스 시장은 과감한 시장개방을 요구하고 있어 이중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은 각료회의 서비스 부문 의장직을 맡아 공산품 서비스 시장 개방을 주창하고 있다.
반면 박홍수 농림부 장관은 이날 열린 개발도상국 그룹인 G33 회의에 참석해 개도국 지위를 계속 인정받는데 주력했다.
협상 분야에 따라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다 보니 협상 상대국에 신뢰를 주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이를 일부 국가에서는 '박쥐'와 같은 이중 플레이라고 꼬집기도 한다는 게 외교부 사람들의 전언이다.
문제는 언제까지 이런 식의 통상외교를 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세계에서 원정 온 WTO 반대 시위대의 절반 이상이 한국 농민들이다.
시위에 참가한 농민단체 관계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농업을 시장 논리로 해결해선 안된다"고 강조했다.
물론 정부가 이들의 외침을 외면해선 안된다.
하지만 연간 무역 규모가 5000억달러가 넘고 수출로 경제발전을 꾀하는 국가가 언제까지 개도국 지위를 인정받을 순 없는 노릇이다.
때문에 최대한 시간을 벌면서 개방의 길로 들어서야 한다는 데 이론이 있을 수 없다.
농민들의 홍콩 원정 시위가 '대안 없는 막무가내식 세계화 반대'가 아니라 농업분야에서 유리한 협상을 이끌어내기 위한 '합리적 의사표시'로 인식되길 바랄 뿐이다.
홍콩=김용준 경제부 기자 juny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