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무역기구(WTO) 6차 각료회의 이틀째인 14일 오전 홍콩 하버플라자에 마련된 한국 기자실에선 해프닝이 벌어졌다. 이날 오후 3시로 예정돼 있던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의 연설문 초안이 나왔다가 1시간30분 만에 수정된 것이다. 논란을 빚은 대목은 "한국은 농업을 포함해 민감한 부문이 여전히 있다. 한국은 협상 진전에 도움이 된다면 신축적으로 대응할 용의가 있다"는 문구였다. 누가 봐도 "한국은 협상 진전을 위해 농업 부문을 양보할 용의가 있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는 내용이다. "진짜 양보할 용의가 있는 것 아니냐"는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해명에 나선 최혁 주 제네바 대사는 "외교무대에서 흔히 쓰이는 표현"이라면서도 "균형있는 협상을 위해 농산물 부문이 무척 어렵지만 타협과 균형을 위해 양보 가능성을 열어놓겠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각에서는 베테랑 협상전문가인 김 본부장이 의도적으로 외교적 수사를 구사한 게 아니냐는 분석도 나왔다. 물론 복잡한 협상을 해야 하는 김 본부장으로선 다소 논란의 소지가 있더라도 외교적 수사를 동원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이 연설문 초안이 전략적인 논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즉흥적으로 작성됐다는 데 있다. 우여곡절 끝에 외교부가 새로 내놓은 연설문에는 논란이 빚어진 대목이 삭제됐다. 김동수 외교부 다자통상국장은 "초안은 연설 직전까지 수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오해의 소지가 있는 부분을 뺐다"고 해명했다. 이 과정에서 김 국장은 "초안은 농림부와 협의를 갖지 않았다"는 점을 시인했다. 이번 회의에 공동대표로 참가한 박홍수 농림부 장관측과 협의도 거치지 않은 채 각국에 한국의 입장을 밝힐 연설문을 그대로 읽을 뻔 했다는 얘기다. 무역대국의 통상외교를 담당하는 부처의 입장에선 농산물 시장 개방을 무조건 반대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미묘한 다자간 협상을 이끌어가면서 내부 조율조차 거치지 않은 채 서둘러 자신의 패를 내보이는 우를 범해서는 곤란하다. 유리한 결과를 이끌어내려면 보다 철저한 준비와 전략이 필요하다는 점을 외교부는 명심할 필요가 있다. 홍콩=김용준 경제부 기자 juny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