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무역기구(WTO) 6차 각료회의 이틀째인 14일 오전 홍콩 하버플라자에 마련된 한국 기자실에선 한바탕 해프닝이 벌어졌다. 이날 오후로 예정돼 있던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의 연설문 초안이 나왔다가 기자들의 질문 세례를 맞은 뒤 한 시간 반 만에 수정됐다. 문제가 된 대목은 "한국은 농업을 포함해 민감한 부문이 여전히 있다. 한국은 협상 진전에 도움이 된다면 신축적으로 대응할 용의가 있다"는 문장.한마디로 "한국은 협상 진전을 위해 농업 부문을 양보할 용의가 있다"는 얘기가 아닌가. 당연히 "농업협상에서 정말 양보할 용의가 있는 것 아니냐"는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해명에 나선 최혁 주 제네바 대사는 "외교무대에서 흔히 쓰이는 표현"이라면서도 "전반적으로 균형있는 협상을 위해 농산물 부문이 무척 어렵지만 타협과 균형을 위해 양보 가능성을 열어놓겠다는 것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물론 그말이 그말이었다. 기자실에서는 김 본부장이 국민들의 정서 등을 감안하지 않고 평소 생각을 그대로 쓴 것이라는 해석까지 나올 정도였다. 이런저런 질의 응답이 오간 뒤 외교부는 결국 20분 만에 새로운 연설문을 가져왔다. 초안에서 "한국은 협상진전에 도움이 된다면 신축적으로 대응할 용의가 있다"며 농업부분의 양보를 시사했던 대목은 삭제돼 있었다. 김동수 외교부 다자통상국장은 "오해의 소지가 있는 부분을 삭제했다"고 해명했지만 문제는 또 있었다. 김 국장이 "초안은 농림부와 협의를 갖지 않았다"고 시인한 것.이번 회의에 공동대표로 참가한 박홍수 농림부 장관측과 협의도 거치지 않은 채 각국에 한국의 '공식 입장'을 밝히는 연설문을 그대로 읽을 뻔 했다는 얘기다. 물론 단순한 해프닝일 수도 있고 무역대국의 통상외교를 담당하는 부처가 농산물 시장 개방을 무조건 반대할 수만은 없다는 현실도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한국의 통상외교는 외국과의 협상보다 국내 협상이 더 어렵다"는 얘기가 있다. 협상을 총괄하는 외교부는 보다 치밀하게 국민정서를 쓰다듬고 관계 부처와 끝까지 조율하는 자세를 갖는 것이 어려운 대외 협상의 실마리를 풀어내는 지름길이라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김용준 경제부 기자 juny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