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산 약재가 범람하면서 한약 전반에 대한 불신이 커지는 게 안타까워 직접 약초를 재배합니다."


대전~진주 간 고속도로 금산톨게이트를 빠져나와 20분 거리에 위치한 충청북도 영동군 양산면 비봉산 자락에 자리잡은 '제월당 농원'. 구한말 고종황제의 주치의를 지낸 변석홍옹을 시작으로 5대에 걸쳐 한의명가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변 한의원이 약재를 조달하는 약초전문농장이다.


변 한의원은 한양에서 어의로 명성을 날리던 석홍옹이 한일합방이 되자 "왜놈의 녹을 받을 수 없다"며 영동으로 낙향해서 제월당이란 이름으로 문을 연 지 100년간 명문의가의 맥을 이어오고 있다.



[ 사진 : 변기원 원장이 약재로 사용하기 위해 충북 영동군 양산면 제월당 농원에서 직접 재배한 컴프리를 수확하고 있다. ]


5000여평에 달하는 산기슭의 30여년 된 우거진 산수유밭을 지나자 가지런히 정리된 밭고랑마다 백출 곽향 감국 구기자 작약 오미자 자초 당귀 사과채 컴프리 등 한약재로 쓰이는 50여 종의 약초들이 촘촘하게 심어져 있다.


농장 한쪽 자그마한 연못에는 연꽃 부평초 연자육 등심 등 한약재로 사용되는 수생 식물들도 맑은 물속에서 자라고 있다.


국내에서 구할 수 없는 일부 약재를 제외한 모든 약초를 이곳에서 직접 재배해서 쓰고 있는 5대 원장 변기원씨(45)는 수도권의 단골고객들이 고령으로 거동이 불편한 점 등을 감안해서 서울 서초동에서도 한의원(www.okbyun.co.kr)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주말이면 어김없이 영동 농장으로 내려와 약초를 돌본다.


"제대로 된 약재를 사용해 정성들여 짓지 않으면 약효도 나지 않고 반드시 탈이 생기게 마련이지요."


변 원장이 약초를 직접 키우게 된데는 중국산약재의 범람에 대한 위기감도 작용했지만 '좋은 약재가 아니면 약을 짓지 말라'는 150여년을 이어온 의가의 가르침이 큰 영향을 미쳤다. 4대조 석홍옹은 한의는 무엇보다 양질의 약재를 제대로 쓸 줄 알아야 한다며 '꿩대신 닭을 쓰지 말라'는 유훈을 남겼다.


"한약재는 수급이 불안정해 쓸만한 양을 항상 확보해 놓아야 꼭 필요할 때 처방할 수 있습니다.


약재를 미리 확보하지 못하면 어쩔수 없이 다른 대체 약초를 쓰거나 빼놓고 약을 지을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산 수입약재로 인한 한약 전반에 대한 불신이 커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아무리 힘들어도 직접 재배한 약재만 쓰기로했지요."


"농약을 일절 쓰지 않고 자연의 기를 받으며 약초들이 자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주고 있습니다.


수확된 약재들이 약효를 제대로 내기 위해 어떤 약재는 가공하는 데 일주일이 걸려도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적인 방식을 고수하고 있지요."


이를테면 향부자는 어린 사내아이의 오줌에 10일 동안 담갔다가 쓰고 희첨과 숙지황은 술에 쪄낸 다음 말리는 과정을 9번 되풀이한다.


또 삼릉과 봉출은 식초에 담갔다가 볶아내고 광물질인 주사와 적석 등은 독성을 없애기 위해 물에 담그는 수비과정을 거치고 있다.


변 원장은 "요즘은 시골에 어린아이들이 없어 남자아이 오줌 구하는 일도 쉽지 않아 주변 초등학교 몇 군데를 돌아야 겨우 한 통씩 수집해 올 수 있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전통방식을 따른다"고 밝혔다.


가족들이 대를 이어 13년째 변 한의원에 다닌다는 박경순씨(56·서울 서초동)는 "약초 재배과정까지 직접 눈으로 확인하면 저절로 신뢰가 간다"고 말했다.


농장에는 한약재로 쓰이는 밭작물과 나무 이외에도 전시·보존용 재배지를 조성해 놓았다.


음양곽 하늘수박 백부자 천오 등 희귀하거나 멸종위기에 놓인 약초들을 보존하고 후세들을 위한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다.


변 원장은 4대조 때부터 전통보약으로 널리 보급해오던 경옥고가 최근 들어 각종 초고가 보약들에 밀려나는 게 안타까워 경옥고 부흥(?)에 나섰다.


그는 제월당식품회사를 만들고 '변석홍옥고'라는 상표로 경옥고를 대량생산해서 팔고있다. "경옥고는 예부터 기를 내려 스트레스를 해소해 주고 신경을 안정시켜 주는 명약입니다.


뿐만 아니라 정력과 원기보강,면역력 강화에 특효가 있습니다."


변 원장은 경옥고를 전통보약의 최고로 친다. 경옥고는 약재의 신선도에 따라 약효가 큰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이곳 영동농장에서 재배한 재료만으로 제조된다고 변 원장은 말했다. 제조방법도 백자항아리 속에 생지황 백복령 홍삼 꿀을 넣고 72시간 동안 푹 고아내는 4대조 때의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제월당 농원 인근에 사는 최준국씨(56)는 "변 원장 조부인 변상훈 선생 시절에는 충청도 지역시찰에 나선 박정희 대통령도 찾아왔을 정도로 당대 세력가들의 발길이 줄을 이었다"면서 "요즈음은 농원이 구경거리가 되고 있다"고 전했다.


두통이나 어지럼증 등 뇌혈관질환분야 치료에 관심을 갖고 있는 변 원장은 앞으로 전원생활을 하며 각종 질환을 치료할 수 있는 시설을 건립할 계획을 갖고 있다.


영동=백창현 기자 chbai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