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순이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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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때로 진실보다 신화에 열광한다'고 한다.
누추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보다 거짓일지언정 화려하게 포장된 세계를 훨씬 더 선호한다는 것이다.
아무 것도 내세울 것 없는 여성이 우연히 '왕자'를 만난다는 내용의 신데렐라 드라마를 만들면 최소한 실패하진 않는다는 속설도 그런 데서 비롯됐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이 바뀌면 모든 게 달라지는 법.
올해 국내 방송계의 키워드가 된 '순이' 열전은 우리 시청자,특히 여성들의 사고가 얼마나 변했는지 나타냈다.
'내 이름은 김삼순'의 삼순이,'굳세어라 금순아'의 금순이,'장밋빛 인생' 맹순이 등은 더이상 가만히 앉아서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리는 신데렐라가 아니다.
삼순이는 제빵술을 익히느라 손마디가 굵어진 파티셰,금순이는 혼자 아들을 키우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미용사,맹순이는 남편의 구박에 아랑곳 없이 억척스럽게 살다 암에 걸린 주부다.
셋 모두 지극히 현실적인 캐릭터였는데도 수많은 시청자를 울고 웃기더니 '2005년 10대 히트상품'중 하나로 선정됐다.
순이들의 열전이 뜬 까닭은?
삼성경제연구소는 히트상품으로 본 소비 키워드의 하나로 '냉철한 현실인식'을 꼽았다.
예쁘지도,많이 배우지도 않았지만 스스로의 일을 찾아 당당한 직업인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현실에 눈뜬 여성들의 공감을 자아냈다는 얘기다.
실제 삼순은 마지막 회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지금 연애중이다.
결혼할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
아니라고 해도 할 수 없다.
지금 최선을 다해야 하는 건 케이크를 열심히 구우며 나 김삼순을 사랑하는 것이다."
상황이 어떻든 꿋꿋하자고 다짐하는 건 힘겹지만 제 길을 찾으려 애쓰는 이땅 보통 여성들의 모습과 다름 없다.
물론 삼순이는 레스토랑 사장,금순이는 의사의 사랑을 얻도록 함으로써 신데렐라 드라마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음을 알려준다.
그래도 제 힘으로 기술을 익혀 할 말은 하는 직업인의 길을 걷는 게 어딘가.
삼순이 이후에 파티셰를 지망하는 대졸 여성이 늘었다는 것도 순이 열전의 힘일 것인즉.
박성희 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