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봉규 < 한국산업기술재단 사무총장 > 세상을 살면서 우리가 맞닥뜨릴 수 있는 위기는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 첫째가 '폭발적 위기'로 순식간에 발생하면서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까닭에 예측이 어려울 뿐 아니라 이에 대한 대응 또한 어려운 경우다. 둘째는 '즉각적 위기'로 비록 그 강도는 높지만 대응에 약간의 준비가 돼 있고 시간적 여유도 다소 있는 경우다. 셋째는 '잠재적 위기'로 루머와 추측을 통해 어느 정도 예견된 사건이 결국 터지고 마는 경우다. 마지막은 '만성적 위기'로 모두가 공감하는 위기지만 뾰족한 대책도 없고 대응을 해도 별로 약발이 안 듣는 경우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소위 '황우석 쇼크'는 짧은 순간 숨쉴 틈 없이 확대 전개된 속도의 면에서,국내외의 모든 집단에 전해진 충격의 강도 면에서,그리고 속 시원한 대책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폭발적 위기'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번 위기는 오래전부터 다른 한 쪽에서 심심찮게 문제 제기가 있었다는 점에서는 '잠재적 위기'일 수도 있었다. 조금만 더 지혜로웠다면 위기의 전조를 감지하고 검증 과정을 거쳐 대응책을 마련할 수도 있었으리라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아쉬움은 이제 접어두자.위기관리의 첫 단계는 상황을 인정하고 위기 자체를 원망하지 않으면서 스스로를 지나치게 자책하지도 않는 것이다. 지금은 현재까지 전개된 상황을 받아들이고 앞으로의 영향들을 점검하며 그 대안을 모색해야 할 때다. 현재까지의 상황만으로도 황우석 쇼크가 이공계에 미치는 충격은 외환위기가 국민경제에 가한 충격에 비할 만하다. 가장 우려되는 것은 어렵사리 도약의 기회를 맞은 이공계가 오히려 이전보다 더욱 위축되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2000년대 들어 부각된 우리의 이공계 위기는 이제 '만성적 위기' 상황에까지 이르고 있다. 이는 대학 선택에서 이공계 지원을 기피하는 현상에서 단적으로 확인된다. 수능 응시자의 이공계 지원 비중이 90년대에는 45% 수준이었으나 2000년 이후에는 30% 안팎으로 하락했다. 내신 1등급 학생의 이공계 지원 비중도 90년대의 50% 수준에서 최근에는 40% 미만으로 떨어졌다. 이런 현실에서 황우석 교수는 과학기술을 전 국민의 이슈로 부각시켰고 성공한 스타 과학자로서 이공계의 희망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그의 연구 경과와 성과는 수시로 일반인들에게 전해져 남의 얘기로만 알았던 과학기술이 실제로 우리 삶의 질을 개선할 수 있으며 그 경제적 가능성도 무한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했다. 기술적인 업적으로도 최고의 존경과 대우를 받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이공계를 보는 시각의 개선에도 기여했다. 과학고의 이공계 진학률이 2004년에 75.9%에서 2005년에 79.6%로 상승한 사실도 분명 황우석 신드롬과 무관하지 않다. 황 교수는 여러 면에서 한국 이공계의 만성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폭발적인 단초를 제공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 연구의 상당부분이 허구와 작위에 의한 것이라고 해서 우리나라 전체 과학계나 이공계가 매도되거나 난도질당해야 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황우석 교수 사태는 오히려 우리에게 잠재적 기회의 현실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황 교수의 성과에 대한 문제 제기가 국내 과학기술의 질적인 향상과 자정능력(自淨能力)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긍정적인 평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술혁신이 경제뿐 아니라 사회 발전을 이끌 수 있다는 사실,그리고 모범사례로서의 스타는 필요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방법론 등이 우리가 얻은 교훈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번 사태에도 불구하고 모처럼 맞은 이공계 위기 극복의 불씨는 계속 살려나가야 한다는 당위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