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풍수가 사주보다 낫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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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재 < 논설위원ㆍ경제교육연구소장 >
점(占)집들이 문전성시라고 한다.
경제는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렵고 더구나 정치의 해가 밝았으니 당연하다고 봐야할 것인지….
하기야 대통령 조상의 묘자리 풍수까지 따지는 나라 아닌가 말이다.
그러니 정치인들이 민심보다 자신의 사주를 더 살피는 것을 탓할 수만도 없다.
논란이 많은 연초 개각도 새 장관들의 면면을 보니 그런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 같다.
때문에 적임자 여부를 떠나 '감투는 운수 소관'이라는 말도 나올 테고.
정적(政敵)의 조상 묘에 무쇠 칼날을 박아두기도 하고 멀쩡한 대학이 운명 철학가와 풍수가를 교수로 초빙하는 그런 사회다.
하물며 취직을 못해,사업에 실패해,결혼을 못해 점집을 찾는다면 비난이 아니라 차라리 연민의 대상일 뿐이다.
부동산 투기는 용서 못하지만 부인의 무당 푸닥거리는 국회 인사 청문회조차 일축해버리는 반(反)지성의 나라가 또한 한국이다.
직무 부적합성으로 따지자면 부인이 점집을 들락거리는 것이 고위 법조인의 더욱 큰 문제일 것이다.
법이란 두말없이 합리주의 그 자체지만 이게 한국의 수준이다.
'몸에 칼이 들어와야 하는 운명'이라는 점괘를 받고 액땜을 위해 부부가 함께 눈두덩이 벌겋게 부어오르도록 쌍꺼풀 수술을 했다는, 믿거나 말거나 식의 몹쓸 헛소문이 버젓이 나도는 그런 나라다.
대기업체 임원들을 움직이는 것은 CEO지만 그들의 부인들을 움직이는 것은 그녀들이 떼지어 찾아다니는 역술가라는 우스개도 있다.
차라리 주술 사회라고 부르는 것이 어떨는지.더구나 지금은 인사철에,입시시즌에 바야흐로 인물(人物)들의 계절이 아닌가 말이다.
대학교수들이 뽑았다는 올해의 사자성어도 웃기기는 마찬가지다.
주역식 조어법을 끌어대지 않고는 우리사회를 설명할 적당한 단어를 찾지 못한다면 차라리 지성의 간판을 내리는 것이 옳다.
학자들조차 세계를 64개 숫자 조합으로 밖에 인식하지 못한다면 현대 학문은 수비학(數秘學)으로부터 몇 걸음이나 나아갔는지.
하기야,박사 명패만 모아도 한 트럭은 될 법한 정부 기관들이 내놓은 경제 예측조차 모조리 틀리고 있으니 사업하는 사람치고 역술가를 찾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다.
가장 기본적인 성장률 전망치만 해도 지난 2,3년간 모조리 과녁을 크게 빗나갔다.
그래서 장밋빛 새해 전망도 다만 덕담으로 받아들일 뿐이다.
국내 전망치만 그런 것도 아니다.
세계의 내로라하는 이코노미스트들이 일제히 폭락을 점쳤던 달러 가치는 지난해 14%나 되레 절상되고 말았다.
내릴 것이라던 유가는 70달러를 넘었고 파장 분위기였던 미국 경제는 웃기지 말라며 성장률 4%와 실업률 5%를 달성해냈다.
존폐 기로에 놓일 것이라던 구글은 욱일승천했고 감소할 것이라던 허리케인은 사상 최악의 재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러니 믿을 것은 점괘밖에 없기도 할 테다.
그러나…,그러나 말이다.
2000년도 더 전에 맹자가 미리 정리해 두었다는 이 명제를 잊지 말자.제자들의 질문에 맹자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천시불여 지리요, 지리불여 인화"(天時不如地利,地利不如人和)라고.이 말을 대충 번역하면 사주(천시)는 풍수(지리)에 못미치고 풍수는 사람의 노력(인화)에 못미친다는 말이 될는지….
"운명 점술은 맞다면 맞기 때문에 볼 필요가 없고 틀리면 틀리기 때문에 볼 필요가 없다"고 말한 사람은 과학철학의 논리를 다듬었던 칼 포퍼 교수다.
그는 이 논리로 혁명을 예언했던 마르크시즘 등 소위 역사주의(historicism)를 깨끗이 잠재웠다.
우리가 포퍼나 맹자 만한 지성은 없더라도 노력하면서 사는 자세만큼은 굳건히 가질 수 있을 테다.
올 한 해 독자 여러분의 건승을 빌어본다.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