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재료 가격 급등과 중국 업체들의 저가 물량 공세에 따른 채산성 악화.70∼80년대 한국 산업화의 기수였던 화학섬유업계가 처한 현실이다.


화섬업체들은 지난 2∼3년간 사상 최대의 위기에 봉착했다.


효성 코오롱 등 주요 기업은 지난해 그룹의 모태였던 폴리에스터와 나일론 생산라인을 대부분 없애고 새로운 출발 선 위에 섰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자는 각오다.


30여년 전 일본 기업들은 우리와 비슷한 위기를 겪었다.


혹독한 변화의 바람 속에 살아남은 일본 화섬업체들은 이제 탄탄한 기술력과 위기대처 능력으로 무장,밝은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일본 화섬사들의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 전략을 벤치마킹하려는 이유다.


일본 혼슈(本州)의 서쪽 해안에 자리잡은 이시카와현(縣).일본의 전통적인 실크산지이자 섬유산업으로 유명한 곳이다.


지난달 하순 찾아간 이시카와현의 염색 전문업체 고마츠세이렌은 '지저분하고 영세한 염색공장일 것'이라는 상상과는 달리 무인화된 최첨단 시스템을 갖춘 대형공장이었다.


다품종소량 생산체제를 갖춘 공장 내부에선 직원들이 새 기술을 적용한 제품의 품질을 점검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상장업체인 이 회사는 이 지역에만 5개의 공장과 연구개발(R&D)센터,패션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고마츠세이렌이 한국의 염색업체들과는 달리 중견 알짜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건 일본의 대표적 화학섬유업체인 도레이가 있었기 때문.도레이는 이시카와공장에서 원사(실)를 개발하면 협력 염색업체나 직물업체를 찾아가 디자인 및 용도 등을 강구해왔다.


'협력업체와 협력하지 않으면 부가가치가 높은 소재를 개발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도레이는 최근 이 같은 협력업체와의 '상생경영'에 더욱 강한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지난 2004년 11월 고마츠세이렌을 포함한 이시카와 지역 협력업체들과 '도레이 합섬클러스터'를 조성한 것."숲이 번창하면 나무도 잘 큰다"는 마에다 가쓰노스케 도레이 명예회장의 경영철학에 따라 원사업체부터 직물업체까지 모든 관련 업체가 머리를 맞대고 상생의 길을 찾아보자는 취지에서다.


68개 업체로 시작한 클러스터 가입 업체는 1년 새 90개사로 늘어났다.


"과거 염색·직물 업체들은 도레이와 같은 화섬업체에만 의존하는 '바보 경영'을 해왔습니다.


신제품이나 브랜드를 개발하고 제품을 개선하려는 의지가 전혀 없었죠.엔고 현상으로 수출이 어려워지고 중국업체들이 저가 물량을 쏟아내면서 화섬업체가 줄어들자 가공업체들도 함께 줄도산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나카야마 겐이치 고마츠세이렌 회장)


한국 섬유산업의 위기와 너무 닮은 꼴이지만 일본 업체들은 도레이의 리더십 아래 '민간 주도의 클러스터'라는 그들만의 돌파구를 찾아냈다.


"일본 섬유산업의 유일한 돌파구"(나카야마 회장)를 창조해낸 것이다.


클러스터 참여업체들은 일본만이 만들 수 있는 제품을 개발하기 위해 공동으로 제품을 기획하고 있다.


그동안 꼭꼭 숨겨오던 각 업체의 기술도 클러스터 내에서는 공유키로 했다.


지역의 대학 및 연구기관과 손잡고 '산학 협동'으로 신소재 개발을 위한 연구개발(R&D)에 나선 건 물론이다.


현재는 도레이가 사무국 역할을 하고 있지만 조만간 나카야마 회장을 클러스터 회장으로 선임하고 업체 간 이해와 개발계획 등을 조율할 '기획회사'도 설립키로 했다.


기노시타 겐이치 클러스터 사무국장은 "업체 임직원들끼리 탄소섬유(산업용 첨단섬유) 연구회 등 9개의 연구모임을 만들어 함께 공부하고 있다"며 "9개의 연구회 중에는 러시아연구회 인도연구회 등 새로운 시장을 연구하기 위한 모임들도 있는데 이는 시장의 요구에 빠르게 대처하면서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탄소섬유 연구회장을 맡은 마루이직물의 미야모토 도루 사장은 "그동안 탄소섬유는 골프채와 낚싯대,비행기 동체 등에 사용되고 아라미드섬유는 방탄복,우주복 등에 사용됐지만 완전히 새로운 용도로 개발하기 위해 관련 업체와 대학,연구기관들이 공동 연구에 나섰다"며 "일부 품목은 테스트 단계에 있다"고 말했다.


그는 "비싸도 팔리는 위력적인 제품을 만드는 게 마루이직물을 포함한 클러스터 소속사들의 목표"라며 "한국이나 중국이 아닌 일본에서만 만들 수 있는 제품을 클러스터에서 개발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카나자와(일본)=유창재 기자 yooco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