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권태'와의 이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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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소운 < 시인 >
병술년 새해가 밝은 지 꼭 일주일째다.
해는 다시 떠올랐지만 우리의 마음은 그리 밝지만은 않은 것 같다.
아무 생각 없이 살다가 달력이 한 장 남았다거나 새 달력을 받았을 때 갑자기 세월의 물살을 느끼게 된다.
마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하는 사이 모두 다 도망 가버린 술래놀이 같이.눈 한번 감았다 뜨는 사이 하루는 후딱 지나가고 만다.
일상의 감옥에 갇혀 자기 안의 무한한 잠재능력을 잠재우고 있지는 않았는지,개띠해인 새해에는 개처럼 발발거리며 좀더 넓게 무언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찾아 다녀보자.개들은 놀라운 후각과 청각을 지녔다.
인간보다 월등히 예민하다.
냄새를 잘 맡는 사람보고 개코냐 하는 것도 개의 뛰어난 후각 때문일 것이다.
소나 돼지의 양식을 '죽'이라고 하나 개에게는 '밥'이라고 하는 것도 개의 품격을 높여주는 차원이 아닐까.
개의 위장 구조가 사람과 닮았다고 해서 개고기를 꺼리는 사람도 많다.
개는 눈과 귀만 밝은 것이 아니라 귀소성까지 뛰어나다.
인간에게 충성을 다하는 필요 조건들을 모두 갖추고 있다.
개에 대해 잘 모른다 할지라도 꼬리 위치를 보면 개의 심리상태를 조금은 알 수 있다.
꼬리가 처져 있을 때는 항복을,꼬리가 치켜 올라간 상태는 뭔가에 호기심이 발동할 때,꼬리를 흔들 때는 반가움이라는 것을.우리도 상대방과 대화를 하다가 조금 밀린다 싶으면 '꼬리 내린다'라는 말을 곧잘 사용한다.
이젠 꼬리를 올리고 모든 일에 호기심을 가져보자.
호기심 반대말이 권태라고 했던가.
남녀관계도 그렇지만 일에도 권태를 느낄 때가 있다.
남녀가 처음 만났을 때는 서로에게 강한 호기심을 보이다가 열정과 몰입의 단계를 지나고 나면 조금 느긋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나마 그 정도라도 잘 유지하면 다행이지만 서로에게 지루함을 느끼게 되는 순간 신비감은 사라진다.
더 이상 상대에 대해 새롭게 알 것이 없을 때 권태감을 느낀다.
그 권태로움을 사전에 막기 위해서는 서로가 끊임없이 노력해야만 한다.
늘 새로운 시각으로 보려는 마음자세가 필요하며,적당한 긴장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일도 그렇다.
늘 잘하던 일도 어느 순간 싫어지고 권태로워질 때가 있다.
권태에 녹아들지 않으려면 다른 무언가에 미쳐야 한다.
그래서 일이 아닌 새로운 또 다른 뭔가를 충전시킬 필요가 있다.
일도 그냥 좋아서 하는 것보다 그 일에 특별한 열정으로 몰입할 수 있다면 분명 성과는 배가 되리라.
어떤 일에 종사하든 간에 모든 일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다.
희망에서 시작했다가 실망과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지기도 한다. 그 끝없는 나락 속으로 빠져본 사람은 알리라. 그리하여 바닥에 닿아본 사람은 그 바닥이 얼마나 편안한지를 잠시나마 느낄 수 있다. 그 기간이 오래 지속되면 안 되겠지만 잠시 쉬어간다고 생각하면 된다.
추락하기까지의 과정이 불안하고 초조할 뿐이다.
어디까지가 바닥인지 그 알 수 없는 추락,떨어지지 않으려고 매달릴 때가 힘겹다.
그건 분명 두려움이다.
이럴 때 '그래 다 버렸다'라거나 '다 비웠다'라는 말은 오히려 사치이거나 여유 있는 표현이다.
'다 포기했다'는 게 맞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포기가 아니다.
일단 바닥에 닿고 나면 달라진다.
공도 바닥에 닿아야만 다시 튀어오를 수 있다.
그때가 새로운 무언가에 도전할 수 있는 기회다.
그러니 절망적인 일이 있더라도 꼬리 내리지 말자.개의 호기심처럼 끊임없이 발발거리고 창의력을 발휘하자.
동그라미를 그려보면 처음과 끝은 분명 만난다.
오늘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시작임을 알고 다시 튀어오를 방법을 찾아 나서자.그리고 삶의 불꽃을 태울 수 있는 한 해가 되자.날마다 해가 다시 떠오르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