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웨이트에서 `의회 쿠데타'가 일어났다. 몸이 아파 왕권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는 국왕을 국민 대의기관인 의회가 표결로 몰아낸 것은 쿠웨이트는 물론 아랍ㆍ중동권에서 처음있는 일이다. ◇국왕 책봉에서 퇴위까지 = 지난 15일 셰이크 자베르 알-아흐메드 알-사바 국왕의 사망 후 쿠웨이트 왕권은 왕세자이던 셰이크 사드 알-압둘라 알-사바(76)에게 자동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신임 국왕의 건강문제가 돌출했다. 지난 97년 결장암 수술을 받았던 사드 국왕은 고령에다 거동이 불편할 정도로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 휠체어 생활을 하고 있다. 현지 언론은 그가 즉위선서도 하지 못할 만큼 병약한 상태라고 전했다. 최근 사망한 알-사바 국왕에 이어 새 국왕의 건강문제가 쟁점으로 떠오르자 쿠웨이트 여론은 건강한 새 왕을 찾아야 한다는 쪽으로 흘러갔다. 왕실 내부에서도 건강한 사람이 왕권을 맡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고, 급기야 왕실의 일부 인사들은 지난 20일 사드 국왕과 비슷한 나이지만 건강한 것으로 알려진 셰이크 사바 알-아흐마드 알-사바 총리를 찾아가 왕권 승계를 요청했다. 또 사바 총리가 이끄는 내각은 23일 사드 국왕의 건강상태를 들어 그의 즉위식을 하루 남겨놓고 퇴위문제를 논의할 것을 의회에 요청했다. 쿠웨이트 헌법은 의회가 재적의원 3분의2 이상의 동의를 얻어 건강문제 등으로 업무수행이 불가능한 국왕의 퇴위를 결정할 수 있도록 돼 있다. 이때까지 사드 국왕은 개인적으로는 양위 의사를 밝혔지만 자신이 속한 집안의 반대로 확고한 결정을 내리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쿠웨이트는 사바 왕가를 이루는 자베르와 살렘 등 두 집안에서 번갈아 왕위를 계승하는 전통을 지켜왔고, 이번에는 사드 국왕의 살렘 집안이 국왕을 맡을 차례였다. 사드 국왕이 머뭇거리는 동안 의회는 24일 수차례의 정회 끝에 표결을 강행해 만장일치로 병든 국왕의 퇴위를 결정했다. 뒤늦게 마음을 굳힌 사드 국왕의 양위서가 의회에 도착한 것은 그 결정이 나온 뒤였다. ◇향후 파장 = 의회 민주주의가 비교적 발달한 쿠웨이트에서 일어난 이번 일을두고 일각에서는 의회 쿠데타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군주제 국가에서 종신직으로 여겨졌던 국왕을 생전에 강제 퇴위시키는 사례를 남겼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쿠웨이트 내부적으로는 의회의 이번 결정이 민주주의를 한단계 더 성숙시키는 계기로 작용할 전망이다. 분석가들은 쿠웨이트의 사례가 군주제를 채택하는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오만, 바레인 등 걸프연안 국가들에 중장기적으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당장 사우디의 파드 국왕은 82세의 고령이어서 건강문제로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 쿠웨이트의 사례는 또 장기 집권으로 고령의 지도자들이 많은 중동ㆍ아랍권에서 젊은 지도자로 세대교체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키울 가능성이 있다. 올해 69세가 되는 알제리의 압델아지즈 부테플리카 대통령은 최근 위 수술을 받는 등 건강이 좋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고, 78세가 되는 이집트의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은 건강한 편이지만 고령으로 5번째 임기(6년)를 다 채우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올해 71세인 팔레스타인의 마흐무드 압바스 수반도 지난해 병원에 입원해 신병치료를 받았다는 소문이 있었다. 이밖에 미국으로부터 축출압력을 받고 있는 레바논의 에밀 라후드 대통령과 튀니지의 진 엘-아비디네 벤 알리 대통령은 올해 70세다. 중동아랍권에서 최장기 집권하고 있는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 국가원수는 올해 64세로 비교적 젊은 편이지만 가끔 건강이상설이 나돌고 있다. (카이로=연합뉴스) 박세진 특파원 parksj@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