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에 있는 신발업체 T사의 김 모 사장은 설을 앞둔 지난 27일 직원들에게 상여금을 지급하면서도 마음이 씁쓸했다. 지난해 말 경력 5년차 대졸 사원 10명이 한꺼번에 외국계 대형 유통업체로 떠난 뒤 발생한 업무공백이 도무지 메워지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는 "창사 이후 고졸 직원들만 뽑아오다가 수출 시장을 뚫기 위해 외환위기 이후 처음으로 대졸 신입사원을 채용했다. 똑똑한 직원들이 들어와 회사가 발전하겠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대부분 대기업으로 가버렸다"며 "이들에게 들어간 비용과 시간을 따지면 손해가 이만저만 아니다"라고 하소연했다. 중소기업에서 3∼5년 정도 경력을 쌓은 뒤 대기업으로 떠나는 '메뚜기' 직원들로 인해 중소기업 경영주들에게 비상이 걸렸다. 몇 년 동안 공들여 키운 인력이 빠져나가면서 회사 운영에 차질이 생기는 것은 물론 기술 유출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30일 노동부와 업계에 따르면 직원 수 300명 이하인 중소기업의 인력 이직률은 2002년 2.47%에서 2004년 2.77%로 상승했다. 반면 같은 기간 직원 수 300명 이상인 대기업의 인력 이직률은 1.66%에서 1.45%로 떨어져 중소기업과는 대조적이었다. ◆중기마다 인력 이탈로 전전긍긍 부산에 있는 페인트 제조업체 J사는 2004년 11월 경력 4년차 엔지니어 3명이 대기업 페인트 사업부로 옮긴 뒤 한동안 공장 가동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들이 회사에서 몇 명 안 되는 페인트 제조 기술을 지닌 숙련 직원이었기 때문이다. 회사 관계자는 "해마다 2∼3명의 3년차 이상 경력자들이 대기업으로 떠나고 있다"며 "5년 전에는 신제품 프로젝트팀이 통째로 옮겨가면서 애써 개발한 기술이 사실상 무용지물이 됐다"고 말했다. 정보기술(IT) 업계의 사정은 더욱 심각하다. IT 업종이 성장하면서 전문 인력들이 부족하자 IT 관련 대기업들이 중소기업 경력직들을 싹쓸이 해가고 있다. 항만물류 IT업체인 토탈소프트뱅크 인사 담당자는 "신제품 개발을 위해 5년차 이상 IT 전문인력을 구하고 있지만 경력자들을 구하기가 하늘에 별따기"라고 말했다. ◆대기업 협력 중기로도 유출 최근 들어 중소기업 간에도 작은 업체에서 더 큰 업체로 옮겨가는 경력 직원들이 생겨나고 있다. 광주 하남산업단지 내 전자부품 제조회사인 O사의 경우 전체 직원 20명 중 8명이 규모가 큰 삼성전자 협력업체로 이직했다. 삼성전자 생활가전사업부 생산공장이 광주로 이전한 뒤 지난해부터 수원에 있던 협력업체들이 광주로 옮겨온 '후폭풍'의 영향이다. 이 회사 이 모 사장은 "그동안 대기업에만 신경을 썼는데 이제는 같은 중소기업까지도 신경을 써야 할 판"이라며 "규모가 작은 중소기업일수록 경력직원의 이탈로 인한 피해가 더 크다"고 토로했다. 경기 화성지역의 경우 기아자동차 화성공장에서 생산하는 중형승용차 로체가 판매 호조를 보이면서 최근 협력업체 간 인력 이동이 잦다. 경력 직원들이 보다 규모가 큰 협력업체로 이동하면서 속을 끓이는 소규모 협력업체들이 속출하고 있다. ◆명문대 졸업자 채용 기피 경력 직원들이 대거 대기업으로 빠져나가면서 중소기업은 이들의 빈자리를 채울 인력을 구하느라 골머리를 앓고 있다. 비슷한 자질과 경력을 지닌 직원을 찾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하고,신입사원을 채용하는 데도 애를 먹고 있다. 인천에서 쓰레기 압축기 등을 생산하는 K사의 김 모 사장은 "요즘 신입사원들은 4대 사회보험 가입은 물론 주 5일제 근무,자가용 주차장,식당,탈의실 등은 기본적으로 요구한다"며 "인맥을 통해 알음알음으로 사람을 구해보고 있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다"고 전했다. 대기업으로의 인력 유출이 심해지면서 상당수 중소기업은 신입사원을 채용할 때 명문대를 졸업하거나 너무 똑똑하다 싶은 사람은 아예 뽑지 않고 있다. 3년 정도 지나면 10명 가운데 8명은 규모가 더 큰 회사로 가버린다는 이유에서다. 한 중소기업 인사담당자는 "결국 인재를 키워 고스란히 대기업에 갖다 바치는 악순환만 되풀이하고 있다"고 씁쓸해했다. 강동균·문혜정 기자 kd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