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그 많은 팝송들은 어디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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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재 < 논설위원·경제교육연구소장>
한국의 여대생들이 브래지어와 팬티와 스타킹을 벗어던지면서 열광하던 것이 벌써 30년도 전의 일이다.
팻 분과 클리프 리처드와 톰 존스에 목을 매던 그때의 여대생들은 이미 중년의 나이조차 훌쩍 넘기고 있을 테다.
노래라면 오직 엘비스 프레슬리이거나 아니면 요란하게 술이 달린 옷과 다리 흔드는 춤까지 그를 흉내낸 남진뿐이던 그런 시절이었다.
미8군 무대를 뛰는 가수들이라야만 했고 아니라면 일본 엔카(演歌)의 연장일 뿐이었던 뽕짝이 전부였다.
팝송을 듣는 사람과 뽕짝을 듣는 사람은 아예 다른 종류의 인간들처럼 인식되었다.
두 계급의 경제적 문화적 대립은 오늘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 않았다.
70년대 들어서야 비로소 신세대 포크송이라는 것이 나왔다.
그것조차 처음엔 송창식과 윤형주 스타일의 번안 가요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점차 이들이 대세로 되어갔다.
번역과 번안체가 아닌 순 한국 말투로 가사를 지어 부르는 노래는 아마 "이문세 들어서 비로소…"라고 말해도 무방할 테다.
경제가 성장하고 중산층이 형성되면서 비로소 한국사람은 그렇게 자기 말로 대중가요를 짓고 부르게 되었다.
지금은 겨우 몇 개 남은 팝송 프로그램이래봤자 어렵사리 청춘 행세를 할 뿐인 중늙은이들이 진행을 맡고 있는 정도다.
영화도 다를 바가 없다.
할리우드 영화라야만 팔리던 시대는 ET와 스타워즈까지였다.
지금 스크린쿼터 반대 운동의 선봉에 서있는 안성기의 고래사냥과 영자의 전성시대를 거치면서 한국 영화는 서서히 한국인들의 노래가 그랬듯이 주류가 되어 무대로 올라섰다.
장동건의 친구가 나오고 여자보다 예쁜 남자 이준기에 이르면 한국 영화는 이미 "나 잡아봐라!"며 바닷가에서 어설프게 넘어지거나 팔도 사나이 박노식이 무작정 어깨에 힘만 주던 그런 시절과는 확실한 선을 긋고 있다.
문화산업은 그렇게 스스로를 개척해왔다.
소설 또한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광수의 사랑 등 전시대의 유산이거나 아니면 헤밍웨이 등 외국 작가들의 작품이 전부이던 그런 시절이 분명 있었다.
이제 그것은 이문열과 황석영과 박경리로 확실하게 건너왔다.
경제의 성장은 그렇게 문화의 지도를 바꾸어가는 것이고 중산층은 그렇게 자신의 언어와 문법으로 자신의 삶을 노래하고 기록하고 그림 그리게 되는 법이다.
지난주 정부는 모처럼 그동안의 어설픈 '참여와 대화' 타령을 접고 스크린쿼터를 축소한다고 전격 발표했다.
늦었다 할 망정 딴죽 걸 일은 아니다. 만일 영화계가 중국 문화혁명기의 마오쩌둥처럼 영화를 대중 동원의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혁명기 러시아의 인텔리겐차처럼 인민 계몽의 도구로 활용하려 들지 않는다면,그리고 68혁명의 장 뤽 고다르를 모방해 영화의 정치화 따위를 고집하지 않는다면 더이상 스크린 쿼터를 고집할 이유도 없다.
물론 영화계의 배후에 그같은 시대착오적 몽상가들이 없는 것은 아닐 테다.
그러나 깡패 조폭 영화라도 좋고 반미·정치 슬로건을 교묘하게 은폐해놓은 영화라도 좋다.
JSA로 휴전선에 도전하고, 실미도로 국방 문제에 도전하고, 왕의 남자로 동성애에 도전해도 좋다.
이미 그런 정도는 웃고 넘길 토대가 갖추어져 있다.
더구나 대박 영화펀드가 팔려나가고, 한류 붐이 아시아를 달구며, CJ 등 거대 자본이 들어와 배급망의 독점조차 우려되는 지경 아닌가 말이다.
그러니 한ㆍ미 FTA를 위해 한국영화가 희생된다는 식의 신파극 같은 주장은 접는 것이 옳다.
영화인들은 하루빨리 촬영장으로 돌아가 또 다른 왕의 남자와 쉬리 2와 영화판 대장금을 만드는 일에 땀을 흘릴 일이다.
영화를 어설픈 이념과 정치 캠페인에 동원할 생각이 없다면 말이다.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