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씨는 1984년 전세계에 생중계된 '굿모닝 미스터 오웰' 이전만 해도 국내에서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한 작가였다.기행을 일삼는 전위예술가 정도로 막연히 알려졌을 뿐이었다. 그러나 당시 뉴욕과 파리, 베를린, 서울을 위성으로 연결해 국내에 TV로 그의 예술세계가 소개되자 백씨는 한순간에 천재적 아티스트로 떠올랐다. 1932년 7월20일 서울 서린동에서 태창방직을 경영하던 백낙승씨의 막내 아들로 태어난 그는 경기중·고교를 나와 일본 도쿄대에서 미학과 음악사,미술사를 전공했으며 1958년에는 독일에서 음악사를 공부한 뒤 전자음악에 심취하기도 했다. 백씨가 예술가로서 세상사람들에게 처음으로 선을 보인 것은 1959년 독일에서였다. 한 해 전 프라이부르크대학에서 존 케이지를 만난 그는 '존 케이지에 보내는 헌정'이라는 제목의 작품을 한 화랑에 전시했으며 이를 지켜본 '플럭서스' 운동의 창시자인 조셉 보이스가 후에 그의 예술세계에 영향을 미쳤다. 1963년에 열린 백씨의 첫 개인전이 유명해진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장치된 비디오' 3대,'장치된 TV' 13대와 함께 피가 뚝뚝 떨어지는 갓 잡은 황소머리가 전시됐는데,개막일에 조셉이 난데없이 도끼를 들어 나타나 전시 중인 피아노 한 대를 부숴버린 것. 백씨는 이후 뉴욕을 중심으로 활동하다 84년 인공위공 프로젝트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 성공하면서 34년 만에 고국을 찾았다. 그는 고국땅을 밟자 마자 '예술은 사기'라고 폭탄선언을 했고,이는 '무엇을 근거로 예술이 사기인가'라는 논란을 불러오며 문화예술계에 한 차례 파문을 일으켰다. 이어 86아시안 게임 때 인공위성 프로젝트인 '바이바이 키플링'을 만들어냈던 그가 88년 서울올림픽 때도 인공위성쇼인 '세계는 하나'를 엮어내 타고난 천재성을 과시했다. 백씨는 1996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몸의 왼쪽 신경이 마비됐음에도 불구,독일비디오조각전(1997) 바젤국제아트페어(스위스 바젤 1997) 98서울판화미술제(예술의전당 미술관 1998) 40년 회고전(미국 캘리포니아 샌타바버라 박물관 2000) 등 왕성한 작품활동을 계속했다. 세계적 명성을 얻게 된 백씨는 1993년 독일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대상의 영예를 차지하면서 경제월간지 '카피탈'지가 선정한 '현존최고 미술가 100명'에 들기도 했다. 현대예술과 비디오를 접목시키는 데 기여한 공로로 '98년도 교토상',한국과 독일의 문화교류에 기여한 공로로 '괴테메달'을 받았고 2000년엔 금관문화훈장도 받았다. 김경갑 편집위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