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계한 세계적 비디오 예술가 백남준… 현대미술 뒤흔든 천재적 실험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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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씨는 시인이며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였지만 무엇보다 비디오아트 창시자로 세계적 미술가 반열에 올랐다.
1932년 서울 서린동에서 태창방직을 운영하던 백낙승씨 막내아들로 태어난 백씨는 경기고를 졸업한 후 일본과 독일에서 미술사학과 음악을 공부했다.그는 1950년대 후반 독일에서 '현대음악의 거장' 존 케이지와 '플럭서스(Fluxus)'운동을 주도했던 조셉 보이스를 만나 예술생애의 전기를 맞는다.고급화·규격화된 기존 예술에 반기를 든 '플럭서스' 운동은 한마디로 'Why not?'(왜 안돼?)이란 정신에서 출발한 예술사조이다.
그는 1960년 '피아노 포르테를 위한 연습곡'을 발표할 당시 무대 아래로 뛰어내려가 넥타이를 잘랐다. 또한 바이올린을 끌고 도심을 걸어다니는 등 파격적인 모습을 연출하기도 했다.
그는 1963년 독일에서 첫 개인전을 열어 비디오예술의 창시자로 주목받았다. 비디오 3대,TV 13대와 함께 피가 뚝뚝 떨어지는 황소머리가 전시됐는데 개막일에 요셉 보이스가 도끼를 들고 나타나 전시 중인 피아노 한 대를 부숴버린 것. 그는 이후 미국에서 샬롯 무어맨과 공연하면서 비디오아트를 예술 장르로 편입시켰다.
특히 1984년에는 파리와 뉴욕,베를린,서울을 위성으로 연결하는 인공위성 프로젝트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기획,지휘해 전 세계인을 놀라게 했다. "원래 예술이란 사기입니다. 속이고 속는 거지요. 사기 중에서도 고등사기입니다. 대중을 얼떨떨하게 만드는 것이 예술입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오웰씨."
인류가 매스미디어에 종속돼 1984년이면 멸망할 것이란 조지 오웰의 예언에 대해 그는 우리는 건재하며 매스미디어는 엄청난 정보와 연대의식을 선사하고 있다는 조롱섞인 문안인사를 올렸다.
그가 창시한 비디오아트는 비디오,즉 TV를 매체로 하는 현대 예술의 한 경향이다. 그는 스스로 개발한 신디사이저를 이용해 다양한 비디오아트 작품을 선보였다. 그의 비디오아트는 일방적으로 정보와 오락을 전달하는 TV의 취약점을 보완해 관객을 작품에 끌어들여 '참여TV'가 되게 하려는 예술적 노력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86년 아시안게임 때 인공위성 프로젝트 '바이바이 키플링'을 만들어냈던 그는 88년 서울 올림픽 때도 인공위성쇼인 '세계는 하나'를 엮어내 천재성을 과시했다.
백씨는 1996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몸의 왼쪽 신경이 마비됐음에도 불구,독일 비디오조각전(1997),40년 회고전(미 캘리포니아 샌타바버라 박물관,2000) 등 왕성한 활동을 계속했다. 그는 1996년 독일 '포쿠스'지가 선정한 '올해의 100대 예술가' 중에 들었고,1997년에는 독일 경제월간지 '카피탈'이 선정한 '세계의 작가 100인'에 포함되기도 했다. 현대예술과 비디오를 접목시키는 데 기여한 공로로 '98년도 교토상',한국과 독일의 문화교류에 기여한 공로로 '괴테메달'을 수상했고, 2000년엔 한국정부로부터 금관문화훈장도 받았다.
유재혁 기자 yoojh@hankyung.com
# 백남준 주요 연보
▲1932년 서울 출생
▲1958년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에서 음악 수업,존 케이지 만남
▲1962년 '플럭서스' 운동의 창시자 요셉 보이스 만남
▲1963년 독일에서 첫 개인전 '음악의 전시-전자텔레비전' 개최
▲1964년 미국으로 건너가 제2회 뉴욕 아방가르드 페스티벌 참가
▲1982년 뉴욕 피휘트니 미술관에서 첫 회고전
▲1984년 인공위성 프로젝트 '굿모닝 미스터오웰' 전 세계 방영
▲1986년 인공위성 프로젝트 '바이바이 키플링' 소개
▲1988년 인공위성쇼 '세계는 하나' 소개
▲1995년 서울 갤러리현대에서 '백남준 95' 전시회
▲2000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회고전,금관문화훈장
▲2001년 영국 '그로브음악대사전' 등재
▲2005년 '베를린에서 DMZ까지'(서울올림픽미술관) 참가
▲2006년 경기도 용인에 '백남준 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