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회장 5개월만에 귀국] "삼성, 비대해져 느슨해진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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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국 5개월여 만에 돌아온 이건희 삼성 회장의 소감은 크게 두 갈래다.
하나는 지난 날에 대한 반성 내지는 성찰이다.
이 회장은 이를 "작년 1년간 소란을 피워 죄송하게 생각하며 모든 책임은 저 개인에게 있다"고 표현했다.
또 하나의 소감은 각오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 회장은 "앞으로 기업인으로서 경제살리기에 진력하겠다"고 말했다.
삼성 관계자들은 이 두가지 방향이 향후 이 회장의 행보를 가늠하게 될 잣대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회장은 지난해 말 미국에서 일본으로 거처를 옮긴 이후 이른바 '도쿄 구상'에 몰두하며 여러 현안들에 대해 나름대로의 입장을 정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도쿄 구상'은 뭔가
우선 이 회장이 '소란'에 대해 '책임'을 느끼고 있다고 한 표현에 주목하는 이들은 이 회장이 뭔가 파격적인 수습책을 내놓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즉 지난해 9월 출국한 시점을 전후로 전개됐던 △옛 국가안전기획부 'X파일'사건 △금융산업구조개선에 관한 법률(일명 금산법) 개정안을 둘러싼 정치권의 지배구조 개선 압박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CB) 저가발행사건 등의 문제는 결국 '삼성 공화국론(論)'으로 대변되는 사회일각의 '반(反)삼성 분위기'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만큼 종합적이고 입체적인 대응방안을 수립했을 공산이 크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일각에서는 삼성이 청와대나 여권 핵심,또는 검찰 등과 상당 부분 조율을 마쳤다는 관측도 대두되고 있다.
특히 삼성 지배구조의 핵심적인 변수로 자리잡고 있는 금산법 개정안에 대해서는 한때 노무현 대통령까지 나서 "삼성이 국민정서를 좀 헤아렸으면 한다"는 의사를 내비친 만큼 이 회장이 뭔가 전향적인 결단의 형태로 문제를 풀어나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예상이다.
◆상생·나눔경영 확대할 듯
하지만 삼성은 공식적으로 이같은 관측을 부인한다.
삼성이 지난해 6월 헌법소원을 제기한 공정거래법 11조(금융사의 의결권 제한을 규정하고 있는 조항)나 소급입법 가능성이 있는 금산법 개정안은 기본적으로 법률적 판단에 따라 진퇴를 결정해야할 문제일 뿐,정치권 등과의 타협에 의해 결정할 사안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이 회장도 귀국회견에서 에버랜드의 CB저가발행사건에 대해 "검찰이나 법원의 결정에 따르겠다"고만 언급했다.
따라서 대다수 삼성측 관계자들은 향후 이 회장이 권력이나 사정기관 등과의 어슬픈 접촉에 나서기보다는 상생경영과 나눔경영의 확대를 통해 반삼성 기류를 누그러뜨리면서 본연의 경영활동을 통해 국가경제 발전에 이바지하는 기업인의 역할에 충실할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이 같은 맥락에서 "국제경쟁에만 신경쓰다보니 삼성이 비대해져서 느슨해진 것을 느끼지 못했다"는 이 회장의 언급은 앞으로 경영실적뿐만 아니라 경제·사회 전반의 환경도 챙겨가며 경영활동을 하겠다는 의지로 해석된다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 노무현 대통령이 신년회견에서 강조한 '양극화 해소'를 위해 삼성이 획기적인 프로그램을 제창하고 나설 수도 있다는 전망이다.
◆귀국 배경은
이 회장이 전격 귀국을 결심한 배경에는 국내 사정이 여전히 좋지 않지만 더 이상 해외에서의 '원격경영'에만 의존할 수 없다는 절박함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글로벌 일류기업으로 도약하느냐의 갈림길에 서있는 삼성의 처지로 볼 때 올해 환율과 유가의 변동성이 너무도 크고 또 사회 일각의 반삼성 분위기를 해소하는 일 역시 이 회장 스스로 나설 수 밖에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 회장은 특히 최근 일본전자업계를 중심으로 '삼성 견제론'이 급속도로 세를 얻어가고 있는 상황에 적지 않은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출국에서 귀국까지
이 회장은 지난해 9월4일 삼성 전용기를 타고 극비리에 일본 도쿄를 경유해 미국으로 향했다.
미국 휴스턴에 있는 MD앤더슨 암센터에서 폐암수술 후유증에 대한 진단과 치료를 받기 위해서였다.
이 회장이 미국에 머무는 동안 국회는 이 회장을 삼성자동차 부실처리와 관련해 국정감사 증인으로 채택했다.
또 10월에는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CB)발행에 대한 법원의 결정이 나왔다.
법원은 지난 1996년 삼성에버랜드 CB 발행을 주도한 허태학 삼성종합화학 사장과 박노빈 에버랜드 사장에 대해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내렸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해 11월 이 회장의 막내딸 윤형씨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이 회장은 큰 충격을 받았다.
심신이 극도로 쇠약해진 이 회장은 연말께 미국을 떠나 일본에 머무르면서 귀국 시기를 조율해 온 것으로 전해졌다.
조일훈·이태명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