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삼성 회장이 8000억원 사재출연과 헌법소원 취하 등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지난해 10월4일 삼성 측에 유죄판결을 내린 '에버랜드 전환사채(CB) 저가 발행 사건' 1심 재판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의 한소식통은 "당시 이 회장은 '우리에 대한 국민정서가 곱지 않은 상황에서 법마저 삼성을 외면한다면 앞날을 헤쳐나갈 방법이 없다'면서 여론을 광범위하게 수렴해 대응책을 내놓을 것을 지시했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이 회장의 외아들인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가 에버랜드 주식 취득으로 얻은 이득을 모두 사회에 환원하고 싶다는 의견을 강력하게 전달한 것도 이 회장의 결심을 앞당긴 요인이었다고 이 관계자는 덧붙였다. 이 상무는 에버랜드 관련 판결 직후 체중이 5kg이나 빠질 정도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이 회장이 사태가 심상치 않다고 느끼기 시작한 때는 신병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출국했던 지난해 9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옛 국가안전기획부의 도청파일 유출사건에 이어 '금융산업 구조개선에 관한 법률(일명 금산법)'에 대한 논란이 본격 점화되기 시작한 때였다. 정치권과 시민단체는 삼성에 십자포화를 퍼부었다. 이 때 이 회장은 종전과는 다른 '총체적인 해법'이 필요한 것 아니냐는 생각을 처음으로 내비쳤다는 것이다. 9월27일엔 노무현 대통령의 이른바 '국민 정서'발언이 나왔다. 노 대통령은 "금산법 규정에 대해 법리적인 논쟁으로 맞서는 것은 국민 정서에 맞지 않는다"고 한 데 이어 이재용 상무의 편법 증여 논란에 대해서는 "과거 증여 행위가 합법적이었다 하더라도 세금을 적게 낸 것은 국민 정서에 맞지 않으며 포괄적인 타협점을 찾길 바란다"고 말했다. 당시 흐름에서 대통령의 발언은 적지 않은 무게를 가질 수 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1주일쯤 지나 나온 에버랜드 1심 판결은 결정타가 됐다. 삼성의 법률가들은 2심 재판에서 있다며 기다려 볼 것을 건의했지만 이 회장은 2심 재판 결과에 관계없이 이제는 자신이 나서 직접 수습해야 할 때라고 판단했다는 후문이다. 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