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답장 빨리 보내주세요." L그룹 A상무는 중학교 1학년생 아들로부터 "휴대폰 문자메시지를 보내면 왜 항상 답장이 늦게 오느냐"는 성화에 시달렸다.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찍어 세 문장을 쳐넣는 데 10분 이상 걸린다는 사실을 아들에게 털어놓을 수 없어 한동안 속앓이를 했다. 피나는 훈련 덕택에 이제 겨우 엄지족(손놀림이 빠른 사람) 반열에 겨우 끼는가 싶었는데 또 다시 아들의 불평이 터져나왔다. 이번에는 "왜 음성사서함에 안 들어가 봤는냐"는 것이었다. A상무는 "왜 안들어 가봤겠습니까. '듣기'를 눌렀는데 '비밀번호 4자리를 눌러달라'는 예쁜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비밀번호가 떠오르지 않는데 환장하겠더군요"라고 하소연했다. 디지털(Digital)이란 '숫자'를 뜻하는 라틴어 'digitus'에서 유래한 말이다. 디지털시대를 맞아 주변에 숫자가 엄청 늘었다. 아침에 회사에 출근해 컴퓨터를 켜면 커서가 패스워드를 입력하라고 깜박거린다. 인터넷으로 주식투자를 하거나 인터넷뱅킹을 이용하려고 해도 6자리 이상의 인증번호와 이체비밀번호를 어김없이 요구한다. 여기에 가족 숫자와 동일한 개수의 휴대폰 전화번호 등을 합치면 기본적으로 암기해야 할 숫자조합이 10개가 넘는다. 고객이나 친구로부터 명함이라도 건네받으면 휴대폰에 전화번호를 등록하기 위해 숫자키를 찾아 바삐 손을 놀려야 한다. 하지만 격무에 시달리는 '4060 아저씨'들에게 이 같은 일은 업무에 못지않은 스트레스를 준다. '첨단기기 기피증'도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아저씨들이 만지면 첨단 디지털 기기도 애물단지로 둔갑한다. 기능이 너무 복잡한 데다 설명서조차 깨알 같은 글씨로 인쇄돼 있다. 시력을 돋우어 설명서를 읽어보지만 보이는 것은 영어와 전문용어 뿐이다. '그리드라인 디스플레이''인공지능 리뷰' 'ISO 버튼'…. 최근 나온 디카(디지털카메라)의 업그레이드된 기능이라지만 아저씨들과는 사실상 아무런 관련이 없다. '패스워드 증후군'에 시달리는 아저씨들도 많다. 컴퓨터 패스워드에서부터 주식투자 인증번호까지 외워야 할 숫자조합이 급작스레 늘다 보니 생겨난 신종 첨단병이다. S그룹 B전무는 얼마 전 황당한 경험을 했다. 집으로 들어가려고 대문 앞에 섰는데 디지털도어록 패스워드가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다행히 집 전화번호는 외우고 있어 엄동설한에 집 앞에서 벌벌 떠는 낭패는 면할 수 있었다. 최이교 로마켓 사장.7000명이 넘는 변호사들의 승패율과 전문성지수를 일일이 계산,공개해 변호사업계의 '공공의 적'이 된 그도 어느 날 퇴근길에 집 전화번호를 기억하지 못해 회사 여비서에게 확인하는 수모를 당했다. 조흥은행 서초동의 C지점장은 "인터넷뱅킹에서 ID를 세 번 잘못 입력하면 더 이상 거래가 불가능하다"며 "ID를 바꾸기 위해 은행으로 찾아오는 손님이 하루에도 10명 가까이 된다"고 말했다. 휴대폰 기능의 증가 추세와 '아저씨'들의 짜증지수는 대체로 비례한다. 실버폰이 탄생하게 된 배경도 이와 무관치 않다. 삼성전자의 휴대폰개발 담당자는 "휴대폰의 수많은 기능이 불필요한 계층도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면서 실버폰이 나오게 됐다"며 "특히 노인이나 치매환자용으로 버튼이 1,2,3이란 숫자 대신 '아들집' 등으로 돼 있거나 OK와 NO만 누르도록 설계된 실버폰도 나와 있다"고 소개했다. 김병일 기자 kb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