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용 <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경제학 > 양극화 해소를 위해 증세가 필요한지,감세를 통해 성장잠재력을 높여야 할지가 정치 쟁점화됐다. 여야 모두 표 계산에 한창이며 정부정책도 방향을 잡지 못한 듯하다. 그러다보니 모든 경제정책을 증세·감세,작은 정부·큰 정부라는 단순 잣대로 평가하는 경향이 늘어나고 있다. 지난달 처음 발행된 20년 만기 초장기 국채 발행이 한 예다. 20년 만기 국채를 발행한다는 발표가 있자 재정팽창을 위한 선행 작업이란 비판이 컸다. 외환위기 이후 국가부채가 크게 늘어나 이를 우려하는 것은 이해가 되나,그만큼 국채관리를 통해 재정부담을 줄여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비판이다. 정부사업 중 상당부분이 임대주택 건설,사회기반 시설 투자와 같이 20년 이상 초장기로 수행된다. 이에 필요한 재원을 단기 국채만 발행해 조달하다 보니 만기가 도래하면 수시로 채권을 재발행해야 했다. 이 때 금리가 하락하면 다행이지만 금리가 상승하면 납세자 부담이 커진다. 20년 만기 국채를 발행해 이들 사업의 조달과 운용 기간을 일치시키면 금리변동에 따른 위험을 줄일 수 있다. 이 밖에도 20년 만기 국채 발행은 다양한 장점을 갖는다. 우리나라에는 초장기 채권이 없어 연기금 보험회사 등 장기로 자산을 운용해야 하는 기관은 해외 채권을 살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퇴직연금제도가 활성화되면 초장기 채권에 대한 수요가 더욱 커질 전망이다. 초장기 국채 발행은 이들 기관투자가의 해외투자를 국내로 환류시키는 효과를 갖는다. 장기 국채는 민간 자금 흐름의 장기화에도 기여한다. 우리나라 회사채는 대부분 3년 미만의 단기채다. 기업의 신용등급이 높지 않아 장기채 발행이 어려운 것도 사실이지만 장기채를 발행하려 해도 적정 금리가 얼마인지 불분명한 것도 장기채 시장이 없는 주요 원인이다. 국채 금리는 모든 채권 금리의 기준이기에 초장기 국채금리가 자리잡게 되면 이를 기준으로 장기 회사채 시장이 형성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렇게 되면 한국은행이 단기금리를 변경시켜 장기금리에 영향을 줄 수 있어 통화정책의 유효성도 증대한다. 이런 장점으로 인해 선진국뿐 아니라 개도국들도 초장기 국채를 발행하고 있다. 영국과 프랑스가 50년 만기 국채를 발행했으며 일본이 30년,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가 각각 15년,20년 만기 국채를 발행했다. 늦게나마 우리나라도 20년 만기 국채를 성공적으로 발행할 수 있을 만큼 자본시장이 성장했으니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이를 계기로 정부가 국채관리 선진화를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할 때다. 이와 관련해 최근 유럽의 변화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유로화 도입으로 인해 유럽 국채는 사실상 통합유럽의 지방채로 전락했다. 통합 이전에는 각 나라마다 국채가 지표채권이다 보니 독점적 지위를 가지고 있어 수요를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유럽 국채 모두가 유로화로 발행돼 국가간 경쟁이 격화됐다. 덴마크 은행이라고 반드시 덴마크 국채를 살 필요가 없다. 독일 프랑스 등 큰 나라 국채를 사면 환위험 부담도 없고 유동성이 좋아진다. 따라서 이탈리아 덴마크 네덜란드 등 소국일수록 비상이 걸렸다. 자국 국채를 많이 판매한 은행과 증권회사 명단을 작성해 정부자금 운용기관 선정 시 각종 혜택을 준다. 장관이 해당 회사 CEO를 초청한 자리에 국채 판매 담당자를 직접 불러 상을 줌으로써 자부심과 위상을 높여주고 있다. 이들 제도가 모두 재정 부담 없이 금융회사 간 경쟁을 유발한다는 점에서 참조할 만하다. 우리나라 재경부의 국고국도 독점적 지위에 만족하지 않고 시장을 찾아다니면서 국채 마케팅을 위해 다양한 제도를 준비 중이라고 하니 기대가 크다. /한국채권연구원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