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3일 저녁 KT&G에 미국의 기업사냥꾼 아이칸측이 보낸 한 통의 이메일이 도착했다. '주당 6만원에 KT&G 주식 매입을 제안한다'는 내용이었다. '공개매수하겠다'고 밝히는 대신 '암시'하는 내용을 슬쩍 담은 것이다. 아이칸측은 KT&G의 반응에는 별 관심이 없는 듯 보인다. 다만 시장에 이 내용이 유포되길 바랐다. 공개매수를 직접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실제 공개매수에 나서지 않더라도 법적 책임을 피할 수 있는 길을 '교묘하게' 열어놓았다. 다음날 주식시장에선 '아이칸이 공개매수에 나선다'는 사실이 널리 퍼져 원하는 효과를 얻었다. 노회한 아이칸과 리히텐슈타인의 '곰의 포옹'(Bear's Hug) 전술이다. KT&G의 반응은 어땠을까. 생각지도 못했던 이메일을 받자마자 벌집을 쑤신듯 시끄러워졌다. 당장 회의를 열어 갑론을박했다. 서신 내용만 보면 공개매수를 뜻하는 것인지,아니면 KT&G가 가지고 있는 자사주와 우리사주를 사겠다는 것인지 종잡을 수 없었다. KT&G는 불과 몇 시간도 안돼 또 한번 당황했다. 아이칸이 보낸 이메일 내용이 외신을 타고 퍼졌기 때문이다. KT&G는 아이칸이 이런 '은밀한 제안'을 언론에 흘리리라곤 상상조차 못했다. 처음부터 '언론 플레이'에 목적을 둔 것이란 속셈을 파악한 것은 한참이 지난 후였다. 세계적인 기업 사냥꾼과,독점기업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커온 KT&G간 싸움의 결과는 애초부터 정해져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한 애널리스트는 아이칸측 입장에선 '꽃놀이패'라고 했다. 아이칸측 공격이 거세지자 마지못해 기자간담회를 열고 며칠전 실적발표 설명회 자료를 그대로 읽고 자리를 뜬 KT&G 사장.'KT&G가 조용히 있으면 M&A 재료가 수그러질 것'이라는 순진한 생각을 가진 경영진.외신에 이메일 전문이 유포되고 있는데도 이메일 내용 공개를 위해서는 상부 결재가 필요하다는 실무진. 아이칸의 프로 테크닉에 맞서 시가총액 12위 기업이 보여주는 아마추어리즘은 안쓰러울 정도다. 외국의 기업 사냥꾼들이 국내 굴지의 기업에 입맛을 다시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고경봉 증권부 기자 kg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