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 이후 소득불균형이 심화되긴 했지만 이를 양극화란 이슈로 둔갑시켜 정치적으로 이용해선 안 된다는 지적이 중견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집중적으로 제기됐다. 또 양극화 해소를 위한 재원 마련은 증세보다는 정부 지출 효율화를 우선 고려해야 하고,재원 투입도 빈곤의 대물림을 막을 수 있는 저소득층 교육투자에 집중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주장이 나왔다. 국가경쟁력 제고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모임인 '국가경쟁력플랫폼'은 한국개발연구원(KDI)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과 공동으로 지난 20일 서울 중림동 한국경제신문사에서 '한국경제 양극화,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주제로 정책토론회를 열었다. 국가경쟁력플랫폼은 김광두 서강대 교수와 이영선 연세대 교수,이필상 고려대 교수 등 국내 중견 경제·경영학자들이 주축이 돼 2003년 결성한 순수 연구모임이다. 이날 토론회에선 곽승영 미국 하워드대 교수가 주제발표를 했고,좌승희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우천식 KDI 연구위원,김흥종 KIEP 연구위원,안상훈 서울대 교수(사회복지학과) 등이 지정 토론을 벌였다. 토론 내용을 정리한다. ◆체감 소득불균형 지표보다 심각 토론 참석자들은 우리나라의 소득불균형이 과거에 비해선 크게 악화됐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김병연 서강대 교수(경제학)는 "도시근로자를 대상으로 한 2004~2005년 지니계수 0.31은 미국이나 영국 등에 비해 높은 것은 아니지만 도시가구 전체를 놓고 보면 0.34에 달해 좀 더 심각한 수준"이라며 "특히 최근의 변화는 경기순환에 따른 것이 아니고 영구적인 충격의 성격을 띤다는 점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김흥종 연구위원도 "지니계수만 보면 소득분배 구조가 심각하지 않다고도 볼 수 있지만 외환위기 이후 양극화가 빠르게 진행돼 체감도는 상당히 크다"고 말했다. 우천식 연구위원은 "외환위기 이후 양극화의 특징은 고소득층과 빈곤층이 양분되면서 두 그룹에 밀집현상(클러스터링)이 생겼다는 것"이라며 "더 큰 문제는 계층 간 이동성(모빌리티)도 낮아지고 있다는 점"이라고 밝혔다. ◆세계화도 양극화 촉진 우천식 위원은 "양극화의 원인은 산업구조가 변해 대기업이 잘 나가면 중소기업으로도 그 과실이 넘쳐 흐르는 트리클 다운(Trickle Down)현상이 약화된 탓도 크다"며 "수출의 부가가치 유발계수가 1994년엔 0.70이었는데 2002년엔 0.63,2003년에는 0.58로 떨어진 것 등이 증거"라고 말했다. 그는 "옛날엔 대기업 수출이 늘면 중소기업의 납품량이 크게 증가했지만 최근엔 대기업의 해외 부품조달이 늘면서 국내 중소기업이 받는 혜택이 예전만 못하다"고 분석했다.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는 "과거에는 근로자들의 복지를 민간기업들이 상당부분 책임졌지만 최근에는 평생고용 등이 약화돼 기업에서의 복지혜택이 줄어든 것도 소득불균형을 악화시킨 요인"이라고 진단했다. 구본영 김&장법률사무소 고문은 "양극화엔 부동산 등 자산소득이 큰 영향을 미쳐 상위 10%와 하위 10%의 자산소득 비중은 1980년대 10배,1990년대 20배,2000년대 40배 등으로 커지고 있다"며 "이것이 하위계층에 좌절감을 주는 가장 큰 이유"라고 지적했다. ◆정치적으로 이용될까 우려 토론 참석자들은 양극화의 심각성 여부를 떠나 이슈화 자체가 정치적으로 이용될 가능성을 경계했다. 좌승희 교수는 "경제학적으로 보면 분배 문제는 성장과는 관계가 없다"며 "박정희 정권 때 고성장을 했지만 분배가 악화됐는가"라고 되물었다. 그는 "소득분배는 외환위기 이후 악화됐지만 이는 실업 때문으로 정부가 실업을 해결하면 된다"며 "이를 정치적으로 확대해 온 사회가 매달리게 하는 게 더욱 문제"라고 밝혔다. 안종범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도 "성장과 분배는 아무런 관계가 없지만 정치적으로 많이 이용당하고 있다"며 "소득불균형을 양극화라고 표현하는 것 자체가 정치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고소득층과 저소득층의 결속력을 봤을 때 상위는 강화되지 않았지만 하위층은 결속력이 강해졌다"며 "이는 양극화라기보다 신빈곤층화라고 표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병연 교수도 "양극화를 해결하겠다는 것은 정치적으로 무책임한 말이며 빈곤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는 접근이 맞다"고 말했다. 안동현 교수도 "최근 양극화 논란은 정치적인 문제이며,고성장을 통해 분배가 악화됐다는 것은 정치적 수사"라며 "분배효율성 측면에서 이를 해결하려면 정부가 실제 양극화 추세를 나타내는 모델을 만들어 명시적 목표를 두고 관리하면 된다"고 지적했다. ◆분배도 성장친화적으로 해야 안상훈 교수는 "분배를 위해 사회 지출을 늘리더라도 이를 어떻게 쓰는가가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북유럽국가와 대륙유럽국가들은 총 사회지출에서 복지지출을 비슷하게 쓰지만 대륙유럽국과 달리 북유럽국은 성장률도 높고 분배도 잘 된다"며 "이는 대륙유럽국의 사회지출이 연금 공공보조 등 현금이전이 대부분인 데 반해 북유럽국은 의료나 보육,교육 등 사회서비스 지출에 많은 돈을 쓰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저소득층에 현금을 직접 지원하는 것은 소비수요를 창출하는 효과밖에 없지만 사회서비스를 늘리는 것은 일자리 창출에 인적자원 투자라는 효과도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안 교수는 "우리가 사회지출을 늘려야 한다면 성장친화적인 사회서비스를 창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흥종 연구위원도 "자본주의 국가에서 초기 부의 불평등을 해소시켜주는 데 중요한 것이 자본시장의 안정성"이라며 "북유럽국은 자본시장이 영·미 수준으로 발전돼 있으며 시장규제 노동규제 등 규제도 대륙유럽국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적다"고 설명했다. 교육 투자를 강조하는 학자도 많았다. 주제발표를 한 곽승영 교수는 "소득불균형의 해결책은 연구개발(R&D) 투자의 혁신,교육과 근로자 재교육에 대한 투자"라고 주장했다. 이인호 서울대 교수도 "최근 경제발전을 이끄는 기술은 정보기술(IT) 바이오기술(BT) 나노기술(NT) 등 인력이 많이 필요 없다"며 "기술적인 차이가 양극화의 원인인 만큼 교육과 사회서비스를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안종범 교수는 "많은 사람들이 복지 재원 마련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지만 기존의 복지재원을 어떻게 써왔는가도 중요하다"며 "복지 지출과 그 필요성에 대한 연구가 선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정리=김현석 기자 reali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