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민 칼럼] 선우후락(先憂後樂) 이라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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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민 < 본사 주필 >
선우후락(先憂後樂).'자신보다 세상을 먼저 생각하는 지사(志士)의 마음씨'를 이르는 말이라는 게 국어사전의 풀이다.
중국 북송(北宋)시대의 혁신적 정치가이자 학자인 범중엄(范仲淹)이 지은 악양루기(岳陽樓記)에 나오는 말로 근심되는 일은 남보다 앞서 걱정하고,즐길 일은 남보다 나중에 즐긴다는 뜻이라고 한다.
흔히 지도자나 공직자들의 필수적인 덕목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국무총리의 '3ㆍ1절 골프'가 사회적 지탄을 받으면서 급기야 사의를 표명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취미라고도 할 수 있는 골프를 친다는 것은 결코 비난받아야 할 일은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 즐거움을 찾아서 즐길 권리도 있는 것 아닌가.
그러나 국정을 총괄하는 국무총리의 경우는 다르다.
또 문제의 골프가 이뤄진 정황을 살펴보면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 너무 많다는 점에서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우선 이해찬 국무총리의 골프 구설수는 벌써 세 번째다.
지난해 식목일과 그해 7월,그리고 이번 3ㆍ1절이 그것이다.
그 때마다 말썽이 된 것은 골프를 친 그 자체가 아니라 대형산불이나 집중호우,그리고 철도파업 등 국민들이 불안해 할 정도의 큰 사건이 일어났는데도 골프를 즐겼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국민들의 불신(不信)과 지탄(指彈)은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국민들을 우습게 본다'는 논리의 등장이다.
작년 골프구설수에 오른 뒤 국회에서 "근신하겠다"고 사과까지 했다.
그런데 골프 자제는커녕 오히려 부적절한 사람들과 어울리는 등 오히려 더 즐기는 듯한 인상을 풍기고 있으니 국민을 무시하는 오만과 독선이 여전한 게 아니냐는 지적이다.
최근 국회에서의 질의 답변 과정에서 보여준 막말과 어우러지면서 그같은 '짐작'은 이제 '단정'으로 바뀌어 버렸다.
외환위기 이후 심화되고 있는 양극화를 걱정하면서 아직까지는 '부자들의 게임'정도로 인식할 수밖에 없는 골프를 총리가 그렇게 즐겼다는 데 대해 서민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이번 사건 때문에 이 총리가 두고두고 풀어내야 할 숙제가 아닌가 싶다.
사실 이 총리는 역대 어느 총리보다 막강한 실세총리로 알려져 있다.
대통령이 국정을 믿고 맡긴 총리였다면 국정철학도 공유했기 때문일 것이다.
국정운영에 있어서 참여정부가 과거정부와 다른 특징이 있음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그것은 보편적 가치의 존중보다 자기중심적 사고에 대한 믿음이 너무 강하다고 평가한다면 잘못 짚은 것인가.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 3주년을 맞은 지난달 25일 북악산을 산행하면서 여러가지 얘기 끝에 "남은 2년도 좀 바쁘고,이런 저런 시비도 많고,계속 시끄럽게 갈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고 결심했다"고 밝혔다.
양극화와 한ㆍ미 FTA체결 등 논란이 많은 사안을 미루지 않고 정면승부를 통해 해결해 나가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지도자의 솔직한 말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시끄러울 것'이라고 예단한 대목은 어딘지 모르게 꺼림칙하다.
총리의 자기중심적 사고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지난 3년이 너무 시끄러웠던 탓이기도 하지만 잘 설득하고 조율해서 시끄럽지 않게 해결해 나가겠다고 말할 수는 없었는지.
국무총리의 거취는 두고볼 일이지만 이 기회에 국가지도자들이 우선해야 할 덕목(德目)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가졌으면 한다.
'미국에서는 전쟁 중에도 골프를 친 대통령이 있었다는데 할 일 다하고 골프 좀 쳤다고 왜 이렇게 야단법석인가' 이렇게 생각할 사람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는 미국이 아니다.
선우후락까지는 기대하지도 않는다.
자신의 생각과 다르기 때문에 국민들의 생각이 틀렸다고 탓하는 것은 지도자로서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