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동휴 교수의 경제사 산책] (3) 미국 공항기의 구호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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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형 뉴딜'이란 말이 자주 들린다.
'뉴딜' 하면 먼저 산업통제와 구호정책을 떠올리고 이 조치들이 대공황기의 실업문제를 해결한 것으로 아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과연 그럴까.
뉴딜 정책의 기조 가운데 하나가 공황 극복을 위해 경제운행과 자원배분을 시장에 맡기지 않고 필요하면 정부가 개입한다는 것이다.
산업부흥법(NIRA)과 농업조정법(AAA)이 대표적 예다.
NIRA(1933년 6월)는 미국에서 독점금지법을 2년간 정지시켰다.
산업대표들이 생산설비,가동시간,생산량 등을 제한하는 규정을 만들어 대통령 인가를 받으면 법적 효력이 발생했다.
법으로 카르텔을 허용한 것이다.
오래된 대기업이나 과잉설비에 시달리던 섬유 철강 석유업 쪽이 NIRA를 환영했다.
실제로 NIRA규정을 경제단체들이 고안한 경우가 많았으며 이에 따라 이들의 정치력도 커졌다.
항공 화학 엔지니어링 등 장래성 있는 신산업과 중소기업 쪽은 소외되었다.
다시 말해 NIRA는 당시 민간기업의 투자의욕을 저해했고 구조조정이나 산업합리화를 통한 산업부흥의 기회를 정치적으로 제약했다.
NIRA는 기업이윤을 보장하는 동시에 노동자소득을 지지하려 했으나 결국 상품시장과 노동시장을 왜곡했다.
생산제한과 가격상승 때문에 달러화를 평가절하한 이후 금 유입으로 얻어진 생산증가효과가 많이 상쇄되었다.
NIRA에 따른 노사합의조건은 대개 노동시간을 단축시켜 고용을 늘리고 임금을 인상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로써 임금이 물가보다 더빨리 상승하자 실질임금상승으로 오히려 실업을 부추겼다.
NIRA가 연간 국민총생산(GNP)을 6~11% 감소시켰다는 평가도 있다.
1920년대부터 누적된 농업공황 해결을 위해 정부는 1933년 5월 농업생산을 통제하는 AAA조치를 시행했다.
경작지 제한에 협조한 농가에 휴경지 지대를 지불하거나 상품신용공사를 통해 저리자금을 지원했다.
그 결과 루스벨트의 첫 임기동안 농산물가격이 50%나 상승했다.
대규모 농가는 큰 혜택을 받은 반면 소작농은 경작지제한조치로 농지에서 축출되는 바람에 타격을 입었다.
임금노동자가 된 이들은 다시 도시노동시장을 압박했다.
구호정책은 '2차 뉴딜'에서 연방정부가 실업자 빈민 등에게 저리대부를 제공하거나 공공근로를 통한 대규모 공익사업(도로·병원·학교·운동장 건설,자연보존활동 등)을 벌이는 방식으로 추진되었다.
국민소득에 대한 정부예산의 비중은 뉴딜이 시작될 당시 12% 정도에서 20% 이상으로 터무니없이 급증했고 그 중 절반 이상이 구호사업에 쓰였다.
19세기를 풍미했던 경제적 자유주의가 반세기 이상 유보되는 계기를 이룬 것이다.
재원은 세수증대로 충당되었다.
당시 재정은 약간 적자였다.
정부가 경기부양을 위해 의도적으로 적자재정정책을 펴서가 아니라 불황기에 세금이 덜 걷혔기 때문이다.
만일 재정운용에 문제가 있었다면 그렇게 막대한 재정지출증가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공공근로사업과 실업보조가 생산효과,고용유발효과가 극히 낮은 부문에 대한 투자여서 경제효율은 떨어졌고 재분배를 위한 이전지출의 성격이 컸다.
공공지출배분에도 형평성 문제가 있었다.
구호수혜규모는 총실업자의 20~30% 정도였다.
근로추진국(WPA)으로 대표되는 구호정책이 가장 활발했을 때조차 실업자는 700만명에 달했다.
구호활동의 소득지지 수준도 낮아 3인 이상 가족의 최저생계비수준에 못미쳤다.
주로 건축종사자,미숙련 생산직노동자가 우선 구호대상자였고 실업률이 높은 연령층(청소년과 노인)은 구호대상선정에서 차별되었다.
대규모 공공지출의 지역별분포에서 어떤 일관성을 찾기는 어렵다.
구호사업에 경제변수보다 재선승리를 위한 정치적 요인이 고려되었다는 혐의를 받을 만했다.
이러한 뉴딜조치들이 실업을 치유한다는 애초 목표달성에는 실패했다하더라도 미국경제에 다른 전기를 마련한 측면은 있다.
NIRA는 노동자의 단결권,단체교섭권을 보장하여 장기적으로 노동조건 개선에 기여했다.
이후 많은 노조가 새로 결성되고 조합참여율도 높아졌다.
1935년 와그너 노사관계법이 NIRA의 노동권조항을 이어받아 노조활동은 1950년께까지 성장했다.
AAA조치도 달리 보면 일종의 농업구조조정이었다.
대대적 구호정책은 대중에게 국가가 일자리를 곧 마련하리라는 희망을 주었다.
오늘날 미국의 '소셜시큐리티' 제도도 이 구호정책의 노령보험에서 발전한 것이다.
이렇듯 뉴딜은 경제가 돌아가는 것에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는 인식을 사람들에게 심어주었다.
이후 연방정부기능은 점차 확대되고 중앙집권화가 진척된다.
이는 예산규모,연방정부 규제확장,연방공무원 수의 증가추세 등에서 뚜렷하다.
여하튼 뉴딜의 산업통제와 구호정책은 공황 회복,실업문제 해결에 근본적으로 도움은 주지 못한 채 비용만 많이 들었다.
우리나라도 일자리 창출과 사회안전망 구축,'양극화' 해소를 위한 대규모 재정지출을 시도하며 뉴딜을 회상하는 모양이다.
긴급시의 응급처치를 잘못 이해하여 부정적 유산을 답습하지 말았으면 한다.
<서울대 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