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걱정스런 '삶의 이벤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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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인희 < 이화여대 교수·사회학 >
낭만도 세월 따라 변해가나 보다.
예전 우리네 학창시절엔 만우절이 제법 큰 명절(?)이었다.
그 날이 되면 강의실 칠판마다 주먹만한 글씨로 '오늘 휴강'이라 써 놓곤 몰래 도망친 친구들 덕분에 하루 종일 수업은 개점휴업을 면치 못하곤 했다.
텅 빈 강의실에 들어선 교수님들도 학생들의 애교어린 장난에 고개를 절레 흔드시긴 했지만,젊은이들의 치기에 흐뭇한 미소로 답하시는 여유 또한 잊지 않으셨다.
어느 해인가 유독 장난끼가 발동한 친구 하나가,제법 치밀한 계획 끝에 만우절을 기해 오랜 연인이었던 남자 친구에게 '가짜 청첩장'을 보냈다.
그 남자 친구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접하곤 눈물을 뚝뚝 흘리며 대성통곡을 하는 바람에,오히려 당황한 우리 친구가 무릎 꿇고 싹싹 비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그 장면을 접한 친구들,정말 눈물 나도록 박장대소하던 기억이 새롭기만 하다.
세월이 흘러흘러 언제부터인가 매년 이맘때가 되니 젊은이들이 모이는 곳마다 현란한 포장의 사탕 바구니 물결이 출렁이는 모습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두어해 전 화이트데이 강의실의 실화 한 토막.200여명이 함께 듣는 교양 수업 시간,강의가 한창 피크에 올랐는데 한 남학생이 강의실 앞문을 열고 들어왔다.
들어오자마자 "누구야!" 우렁차게 여자 친구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닌가.
잠시 주인공 여자친구가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는 사이,주위 친구들은 눈치를 채곤 발을 구르며 환호성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곧 이어 "나 너 사랑한다!"를 외치며 엉덩이 뒤에 감춰두었던 사탕 바구니를 전달하는 순간,강의실은 완전히 흥분의 도가니가 됐다.
그러고 보니 요즘 들어 부쩍 우리네 삶의 이벤트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밸런타인 데이다 화이트 데이다 해서 우리네로선 낯설기만한 명절들이 무수히 만들어지고 있는가 하면,성년의 날과 스무 살 생일을 치르는 관행이 그 어떤 명절 못지않게 성대해지고 있고,특별히 연인들 사이엔 연령의 고하를 막론하고 만난 지 22일째,100일째,1년 등등 둘 만의 기념일을 만들어 자축하는 분위기가 만연돼가고 있다고 한다.
이들 삶의 이벤트화 속엔 관성에 따라 진행되는 지루한 일상으로부터 잠시 탈출해,삶에 활력을 부여하고 윤택함을 더하고자 하는 현대인의 애처로운 노력이 숨어있음을 부인하긴 어려울 것 같다.
덧붙여 동일한 이벤트를 즐기는 집단들 사이엔 '우리는 하나'라는 정체성이 생성되는 동시에,집단 유대감이 증가되고 때론 유사 소속감이 형성된다는 연구 결과도 보고되고 있다.
그럼에도 이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어쩔 수 없는 아쉬움이 담기게 된다.
이벤트란 것이 그 속성상 늘 새롭고 보다 신선하며 더욱 자극적인 재미를 추구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기에,우리네 삶도 덩달아 재미가 의미를 앞서고 즉각적 행동이 신중한 생각을 압도하고 있는 건 아닐는지.뿐만 아니라 친밀성을 표현하고 관계의 의미를 다지는 과정에 소비자본주의의 상품화 논리가 속속 침투함으로써 "물질 가는 곳에 마음 간다"는 고백이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세태가 되었음에랴.
한데 순간의 폭발적 재미를 추구하는 이벤트는 어쩔 수 없이 싫증을 동반한다는 데 현대적 삶의 역설이 숨어 있는 듯하다.
싫증은 참을 수 없기에 다시금 새로운 재미를 찾아 떠나보지만,새로 찾은 재미 역시 또 다른 싫증을 불러일으키는 악순환에 빠져있는 것이 우리네 자화상은 아닐는지.그 옛날 변변한 장난감 하나 없이도 나뭇가지에 돌멩이 벗 삼아 하루 종일 신나게 뛰놀았던 유년의 기억을 가진 세대로선,오늘 우리네 삶은 온갖 장난감의 홍수 속에서도 왠지 심심하고 따분하기만 한 건 아닐까, 기우가 밀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