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자금쟁이들의 최대 고민은 돈 굴릴 데가 없다는 거예요.


우리 더러 왜 자꾸 단기로만 운용하느냐고 그러는데 도무지 방법이 없어요."


한 대기업 재경팀 임원 A씨는 "자금팀의 역할이나 위상이 예전같지 않다"며 이같이 푸념했다.


그는 "옛날 금융회사에 돈 빌리러 다닐 때는 비록 고생스럽더라도 성취감이 있었는데 요즘은 책상에 앉아 단기금리만 쳐다보고 있다"며 "중소기업들은 '무슨 배부른 소리냐'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참 답답할 때가 많다"고 말했다.


한때 회사의 명운을 쥐락펴락하던 대기업 자금부서가 최근 들어 변화와 역할 재정립의 기로에 섰다.


과거 개발경제시대에 투자재원 마련을 주도하며 역동적인 업무영역을 구축했던 자금부서는 이제 현금성 자산을 포함한 현금흐름을 관리하고 운용하는 업무에 치중하고 있다.


여전히 중요 부서로 자리매김되지만 사내 위상은 예전같지 않고,조직도 축소됐다.


◆돈은 넘쳐나는데 길은 없고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에 성공한 대기업들의 자금사정은 갈수록 개선되고 있다.


특히 삼성 LG 현대자동차 SK 등의 대기업들은 그동안의 '선투자-후조달'에서 '선조달-후투자'로 투자전략을 바꿨지만 넘쳐나는 현금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다.


출자총액제와 같은 각종 규제와 상대적으로 비싼 생산비용,대립적 노사관계 등에 대한 부담으로 신규 투자나 기업 인수합병(M&A)에도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삼성전자의 현금성 자산은 6조8685억원,현대자동차는 6조61억원,포스코는 3조3484억원,SK㈜는 1조4119억원 등이다.


이들 자금의 대부분은 만기 3개월 미만의 머니마켓펀드(MMF)나 시장금리부 수시입출금식 예금(MMDA)과 같은 상품에 투자됐다.


이처럼 기업 현금이 초단기로 운용되고 있는 배경에 대해 삼성전자 관계자는 "투자가 위축되면서 보유 현금을 투입할 마땅한 대안이 없는데다 최근 철강 자동차 정보기술(IT) 등 주요 제조 분야의 경기 사이클이 워낙 급변해왔기 때문에 자산의 운용리스크를 최소화하는 데 중점을 둘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외국기업 벤치마킹해야


문제는 글로벌 경영을 표방하고 있는 대기업들이 자금운용 측면에선 제한된 국내 금융시장의 울타리 안에 갇혀있다는 점이다.


지난 2001년 소니가 글로벌 금융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금융자회사를 설립한 반면 대부분의 국내 기업들은 특정 지역별 현금흐름을 통합 관리하는 데도 애를 먹고 있는 실정이다.


또 조(兆)단위의 현금을 관리하는 데 필요한 전문지식이나 노하우를 가진 인력이 부족하다는 것도 문제점으로 꼽히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347억달러의 현금을 보유하고 있는 미국 마이크로소프트(MS)의 경우 총 30명 이상의 전문가들로 자금운용팀을 꾸려놓고 있다.


MS의 현금보유액은 영업이익과 자산운용 수익금을 합쳐 매월 10억달러 이상씩 늘어나고 있다.


MS 역시 안정성을 최우선적인 가치로 자산을 돌리고 있지만 금융지원을 자사의 글로벌 비즈니스와 완벽하게 연계한데다 운용방식 역시 글로벌 금융시장을 무대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많은 기업들의 벤치마킹 사례가 되고 있다.


대기업 자금팀의 한 관계자는 "이제 자금부서도 글로벌 마인드와 전문성을 갖추지 않으면 조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며 "기업이 원하는 자산운용상품을 스스로 설계해서 금융권에 내밀 정도가 돼야 예전의 위상을 되찾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