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초의 일이다. 자가용이 없는 선배와 같이 골프를 쳤다. 골프장에 갈 때는 태우고 갔지만 집안 행사 때문에 도저히 집까지 바래다줄 수 없어 시내에 내려줬다. 미안한 마음에 다음날 아침 전화를 했더니 입이 나와 있었다. 1시간 기다려서야 택시를 탔다는 것. "골프백 들고 서있었더니 째려보고 그냥 가는 택시가 수십대였다"고 했다. 믿겨지지 않겠지만 실화다. 외환위기 직후의 사회적 분위기가 그랬다. '못사는' 사람들이 나라를 살리려고 장롱 속의 금까지 들고 나오는 판에 '감히 골프라니' 식이었다. 이 분위기는 지금도 그대로다. 여행수지 적자를 걱정하는 방송뉴스에는 골프 여행객들의 출국 장면이 단골메뉴로 나온다. 골프는 '아주 나쁜 일'이 된지 오래다. 올해만 해도 국무총리를 낙마시켰고 친구끼리 골프장에 나갔다가 청와대 비서관이 사표를 냈다. 공직사회에 골프금지령이 돌면서 '일반'골퍼들이 즐거운 비명을 지르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공무원들과 같이 치기로 했던 골프가 불발이 됐으니 '대타'로 나와달라는 제의를 이곳저곳에서 받고 있는 것이다. 같은 물도 소가 먹으면 우유가 되고 뱀이 먹으면 독이 된다고 했던가. 몇 년 전 인터넷에 골프칼럼을 연재하면서 미국의 골프산업을 훑어본 적이 있다. 골프야말로 미국이 개척한 블루오션이었다. 종주국도 아니면서 사실상의 주인행세를 하는 나라가 미국이다. 100년도 안되는 사이 많은 '혁신가'들이 나왔다. 아놀드 파머,잭 니클로스,게리 플레이어 등 '살아있는 전설'도 미국 골프업계가 흥행을 위해 만들어낸 장치다. 이들이 내뱉은 '어록'을 모아놓은 베스트셀러도 많다. 캘러웨이,타이틀리스트 등 세계적인 골프용품업체들도 그 바탕 위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미국과 유럽의 대항전인 라이더컵은 월드컵이나 올림픽 못잖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사실 골프만큼 내수기반이 튼튼한 산업도 많지 않다. 국내 골프장 수는 200여개에 이르고 골프인구는 350만여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지난해 골프장 내장객 수는 1700만여명이나 된다. 이 정도 기반이라면 갖가지 골프서비스가 생겨나와야 하고 세계적인 골프용품업체들이 이름을 날려야 정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간 50만여명이 해외로 나가서 약 1조원을 골프치는데 소비하고 있는 게 현실이고 보면 골프에 대한 선입견이 잠재력 높은 비즈니스 하나를 망쳐가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사회적 고정관념의 상징이 바로 공직자 골프 금지령인 것이다. 심심찮게 골프금지령이 나오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갖고 있는 골퍼의 이미지는 상당히 왜곡돼 있다. 캐디들을 '부리면서' 돈자랑이라 하는 사람쯤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평범한 골퍼들은 한 달에 한 번 필드에 나가보는 것이 꿈인 사람들이다. 우리 선수들이 미국 LPGA대회 결승에 오르면 새벽잠을 설쳐가며 응원하는 팬들인 것이다. 골프를 국가유망사업으로 키우자는 얘기가 아니다. 공직자 골프를 무조건 허용하자는 주장도 아니다. 축구와 야구의 예에서 보듯 사회적 통합을 위한 좋은 도구인 스포츠를 사회적 갈등의 증폭 요인으로 만드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부도덕한 사치운동'이라는 선입견을 정부가 굳이 나서서 굳혀갈 필요가 있을까. 한경 가치혁신연구소장 yskw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