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록씨 로비 의혹을 수사 중인 검찰의 칼날이 현대·기아차그룹으로 급속히 선회하고 있다. 당초 김재록씨 비리를 캐는 한 단서로 활용됐던 현대·기아차에 '추가 비자금'이라는 변수가 갑작스럽게 발생했기 때문이다. 법조계에선 사실상 검찰이 현대·기아차그룹에 대한 전면적인 수사에 착수한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현대차그룹 수사로 급선회 대검 중수부 채동욱 수사기획관은 29일 브리핑에서 "당초 김재록씨 비리 의혹이 나무였고 현대차그룹이 그 한 가지였다면 지금은 현대차그룹 수사가 또 다른 나무가 됐다"고 밝혔다. "현대차 비자금 부분은 한 지류(支流)에 불과하다"고 누누이 강조해온 검찰이 현대·기아차 본사를 압수수색한 지 사흘 만에 '김재록씨-현대차 두 갈래 수사'로 입장을 전격 바꾼 것이다. 이를 위해 검찰은 현대차수사를 김재록씨 비리 의혹 수사에서 분리해 별개로 진행키로 했다. 이 같은 '사정 변경'의 진원지는 글로비스에서 발견된 것으로 알려진 '추가 비자금'이다. 채 기획관은 "글로비스 압수수색 과정에서 현대차 비자금과 관련된 단서를 추가로 포착했다. 그걸 덮을 수는 없는 것 아니냐"며 배경을 설명했다. 검찰이 포착했다는 '단서'란 글로비스 본사 비밀금고에서 발견된 수십억원의 원화와 CD(양도성예금증서),미국 달러화 등이라는 관측이 유력하다. 추가 비자금 규모에 대해 검찰은 함구하고 있다. 이와 관련,채 기획관은 수사의 범위를 일단 글로비스의 비자금에 국한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현대차그룹 전체 비자금에 대한 본격 수사 착수는 더더욱 아니라는 점도 강조했다. 한편 검찰의 이 같은 강공 수사가 정·관계와 김재록씨 간의 검은 커넥션과 관련된 현대차 최고위층의 자백을 받아내기 위한 고강도 압박이라는 시각도 없지 않다. 검찰이 누누이 "경영권 승계과정은 현재 수사대상이 아니고 분식회계 수사를 할 계획도,현대차 전반으로 수사를 확대할 계획도 없다"고 강조한 데는 현대차 측에 '퇴로'(退路)를 열어주고 필요한 협조를 받으려는 계산이 깔린 것으로 분석된다. ◆다른 기업 수사는 늦어질듯 검찰의 수사망이 현대차 그룹 오너쪽으로도 좁혀오고 있다. 휴일인 지난 26일 검찰이 현대·기아차 본사를 압수수색할 때 정몽구 회장과 정의선 사장의 사무실도 압수수색한 것이 이를 방증하는 대목이다. 검찰은 또 28일 글로비스 이주은 사장을 구속수감한 데 이어 현대차그룹의 채양기 기획총괄본부장(사장)도 소환,밤샘조사를 벌였다. 이들 두 사람은 정몽구 그룹 회장의 오른팔격으로 그룹 내 안방살림을 도맡고 있는 핵심 인물들이다. 물론 검찰은 "김재록씨 로비의혹 해소가 수사의 본체"라며 확대해석을 경계하고 있다. 채 기획관은 그룹 일가에 대한 출국금지와 관련, "아직 계획은 없다. 하지만 앞으로는 모르겠다"며 그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않았다. 한편 검찰이 현대차그룹 비자금 사건을 별도로 수사하기로 함에 따라 김씨에게 금품을 전달하며 로비를 부탁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다른 기업들 수사는 다소 지연될 가능성이 커졌다. 또 현대차그룹의 서울 양재동 연구개발센터 증축 비리 의혹과 관련한 서울시ㆍ건설교통부 관련자 소환도 조만간 이뤄질 것으로 예상된다. 김병일 기자 kb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