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년간 치열한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려오느라 사회적 기대와 국민의 뜻에 부응하지 못한 점 죄송합니다."

지난 18일 중국 제2공장 착공식에 참석한 뒤 19일 귀국한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은 공항에서 침통한 표정으로 "죄송합니다"라는 말만 30여차례 되풀이했다.

이날 대국민 사과문과 1조원 사재 헌납을 발표한 심경을 대변하는 말이다.

그동안 '약육강식'의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온 힘을 쏟은 탓에 현대차에 대한 국민의 기대와 초고속 성장의 이면에 가려진 각종 부작용을 상대적으로 간과해온 점에 대한 반성과 아쉬움의 표현이다.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세계가 놀란 초고속 성장에 정 회장을 비롯한 임직원 모두가 취해 있었는지 모른다.

성장에 매달리느라 주변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고 말했다.

실제 정 회장은 1999년 1월 현대차그룹 회장에 취임한 뒤 카리스마 넘치는 '현장 경영'을 통해 그룹의 주요 사안을 직접 챙기는 등 안팎의 살림을 도맡았다.

특히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해 2002년 이후 35차례나 해외출장길에 올랐다.

결과는 세계가 놀란 '초고속 성장'으로 이어졌다.

현대그룹에서 계열분리된 2001년만 해도 현대차그룹은 자산 31조원으로 재계 5위에 불과했지만 정 회장은 5년 만에 그룹 자산을 56조원으로 불리며 2위로 올려놓았다.

같은 기간 매출은 42조5000억원에서 87조원으로 늘었다.

그룹의 주력 기업인 현대·기아차의 성장은 한층 눈부시다.

2001년 168만5000대였던 현대차의 생산대수는 지난해 233만8000대로 늘었고,기아차 역시 89만9000대에서 121만5000대로 증가했다.

특히 인도와 터키에만 있었던 현대·기아차의 해외 생산거점이 중국 미국 체코 슬로바키아 등지로 뻗어나가며 글로벌 기업의 위상도 갖춰나갔다.

최근 몇년간의 승승장구를 반영,현대차의 주가는 2001년 2만6900원(연말 종가 기준)에서 작년 말 9만7300원으로,기아차는 8860원에서 2만6550원으로 뛰었다.

미국의 시사주간지인 타임은 지난해 "몇 년 전만 해도 토크쇼의 웃음거리였던 현대차가 정 회장의 '품질경영' 선언 이후 전 세계 자동차업계를 긴장시키는 위치로 변했다"고 극찬하기도 했다.

승승장구하던 현대차에 브레이크가 걸린 건 원·달러 환율이 급락하면서부터.비상경영에 들어간 현대차는 과장급 이상 전 임직원 임금동결을 선언하면서 납품업체에도 단가 인하를 요구했다.

원·달러 환율이 60원 떨어지면 영업이익이 3500억원이나 줄어드는 현대차 입장에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단가 인하 요구는 여론의 거센 역풍을 맞았다.

세계 6위 자동차 메이커란 위상에 걸맞지 않게 정 회장 1인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현대차의 경영시스템과 정 회장의 수시 인사도 이번 사태를 계기로 도마에 올랐다.

현대차 관계자는 "이번 사태를 계기로 현대차의 문제점으로 지적된 인사시스템과 총수의 경영권 집중문제 등에 대한 보완책을 차근차근 마련해 나갈 것"이라며 "투명 경영과 사회공헌을 통해 국민의 사랑을 받는 기업으로 다시 태어나자는 게 정 회장의 의지"라고 설명했다.

오상헌 기자 ohye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