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비의 촉(蜀),조조의 위(魏),손권의 오(吳)가 서로 각축을 벌이다 서진(西晉)의 사마염(司馬炎)에게 중원을 갖다 바치는 허무한 내용을 가지고 중국인들은 아시아 최고의 역사소설 '삼국지(연의)'를 만들어냈다.

서진 이후 오호십육국(316~439)과 남북조(439~589),그 270여년의 혼란을 잠재우며 중원을 통일한 수(隋)와 당(唐)을 연거푸 격퇴한 고구려가 한 축이 되고,백제 신라가 다른 축으로 전개되는 장쾌한 드라마가 삼국통일 전쟁이거늘 우리는 그동안 '삼국지'는커녕 그 비슷한 아류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강의 때 "삼국통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면 부정적인 대답이 훨씬 많다.

고구려가 통일했으면 광활한 만주대륙이 우리 땅이요,백제가 통일했으면 바다 건너 일본 열도가 우리 땅일 텐데 신라가 통일함으로써 반도에 갇혔다는 것이 이유다.

그렇다면 분열시대에는 강자가 승리하는 것이 올바르며,약자는 강자에게 죽어주는 게 역사의 정의인가? 만일 반도에 갇힌 역사의 책임을 신라에게 묻는다면 그 후 1300여년 동안 나머지 선조들은 무엇을 했고,지금 우리는 무얼 하고 있단 말인가?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한탄이 아니라 가장 약소국이었던 신라가 두 강대국을 꺾고 통일할 수 있었던 원동력의 재연이다.

일천 몇 백 년 전 선조들에게 현실의 책임을 돌리는 억지스러운 후손들도 없다.

고구려와 백제를 부인하고 신라만 인정하자는 말이 아니라 고구려의 대륙성과 백제의 해양성을 되살리면서 신라 통일의 원동력도 재연하는 통합적 역사인식을 하자는 말이다.

고구려·백제·신라와 중국,일본까지 연계되는 삼국통일전쟁은 우리 역사상 가장 뛰어난 영웅들이 활약했던 장쾌한 드라마다.

바로 이 시기,우리 역사상 가장 걸출한 영웅들이 펼치는 통일전쟁 시기를 유려한 필치로 그려낸 역사소설이 바로 김정산의 '삼한지'(전10권,예담)다.

저자가 10년 청춘을 바쳤다는 '삼한지'를 읽으면 우리는 비로소 중국 '삼국지'에 필적할만한 역사소설을 갖게 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삼한지'는 그간 우리 역사소설들이 갖고 있던 많은 단점을 보완한 역사소설이다.

첫째 미덕은 치밀한 자료조사와 현장 답사에 있다.

역사소설은 '소설'이지만 '역사'라는 한정어를 달고 있기에 사료의 틀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그간 많은 역사소설은 '역사'를 한정어가 아니라 수식어로 사용한,'역사'를 빙자한 공상소설이었다.

그러나 김정산은 10년 청춘을 바친 머리품과 발품으로 문헌사료와 역사현장을 자신의 것으로 체화시켰다.

사료와 사료의 공백,사료와 현장 사이의 공백,실존인물과 가공인물 사이의 간극이 자연스레 연결되는 것은 문헌사료와 역사현장을 체화했기 때문이라는 점을 사료와 현장을 아는 사람들은 안다.

'삼한지'의 둘째 미덕은 한국 소설에서 이문구나 김주영 이래 거의 명맥이 끊어진 사설조의 긴 문장을 재연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설조 문장이 독자들을 별다른 의식의 충돌 없이 과거의 역사현장으로 안내하는 가이드 역할을 하고 있다.

2000년대에 쓴 소설책이 아니라 당대에 쓴 이야기책인 것처럼 인식하게 만든다.

셋째 미덕은 통합적 역사인식에 있다.

삼국 모두에 역사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역사 인식의 '삼한지'는 다원화를 지향하는 현 시대에 맞는 21세기형 역사소설이다.

'삼한지'가 오래토록 우리 국민의 사랑을 받는 국민 역사소설로 호흡하기를 기대한다.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