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남자를, 이 배우를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어느 날 불현듯 나타나(물론 그는 늘 같은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신선한 충격을 줬던 황정민(36)은 이제 영화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 석자로 기억되고 있다.

"'로드무비' 때나 지금이나 배우 황정민은 달라질 게 없다"고 스스로 말하지만 황정민의 사뭇 달라진 위치는 한동안 송강호, 최민식, 설경구로 이어졌던 '연기파 트로이카'처럼 배우의 선택이 곧 한국 영화의 질을 담보했던 시기를 느끼게한다.

황정민은 27일 개봉할 '사생결단'(감독 최호, 제작 MK픽처스)에서 그는 소름돋는 연기를 펼쳤다.

비록 카메오로 이름을 넣었지만 다른 어느 배우보다 눈에 띄는 연기를 펼쳤던 '달콤한 인생'에서의 광기어린 연기가 전편을 쥐락펴락 사로잡는다면 이해가 빠를 듯.

이 영화에 대해 "끝까지 달려가봤다.

미친 듯이"라고 표현하는 황정민을 만났다.


◇"화산이 터지기 직전의 느낌, 머리에 둥둥 떠 있었다"

'사생결단'은 한국 영화에서 아직까지 본격적으로 소개된 적 없는 마약이라는 소재를 다루는 한편, 한국 영화에서 지금껏 보기 힘들었던 느와르 장르를 멋들어지게 소화해냈다.

구체적인 내용 전개를 뜯어보자면 아쉬운 대목도 있지만, 마지막까지 흐트러지지 않는 집중력으로 관객을 몰입시키는 건 아쉬움이 전혀 없다.

"처음엔 그저 누구도 다루지 않았던 마약을 다룬다는 호기심이 동했습니다.

그러다 시나리오를 읽으니 도진광의 삶이 징글징글하고, 부글부글 끓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치 터지기 일보 직전의 화산과 같다고 할까요.

그런 느낌들이 머리에 둥둥 떠 있었습니다."

도진광은 마약 판매상 장철(이도경)을 잡으려다 사망한 선배의 아내와 몸을 섞게 되고 헤어나올 수 없는 심리적 공황 상태에 빠져 산다.

어느날 내가 살고, 내가 잠 좀 자려면 장철을 잡아야만 한다는 결심을 한다.

그는 상도(류승범)를 이용해 장철을 향해 간다.

끝까지.

"도진광과 이상도는 사다리, 기찻길 같은 관계죠. 함께 가야 할 운명공동체이지만 결코 만날 수 없는. 경주마처럼 옆을 보지 못한 채 달려야 하는 운명입니다.

한번 끝까지 가보자고 했죠. 막상 가보았더니 더 무거워지면 무거웠지 결코 가벼워지지 않더군요."

그는 "정말 열심히 했다"고 말했다.

누구든 열심히 하겠지만, 그 '열심히'라는 게 다 같을 수는 없단다.

어떤 생각을 갖고 열심히 하느냐의 문제라는 것. 얼굴을 예쁘게 보이려고 열심히 하는지, 역할이나 인물을 예쁘게 보이려고 열심히 하는지. 배우가 두는 목표에 따라 영화는 달라진다고 했다.

징글징글하도록 끝까지 내달리는 이 영화를 통해 관객은 무얼 얻을 수 있을까.

"저 인간 불쌍하다는 생각이죠. 도진광과 이상도를 보면서 '나는 저렇게 살지 않아야 할 텐데'라고 생각하면 좋겠어요."


◇류승범과의 착착 들어맞았던 호흡

류승범과 연기하면서 희열을 느꼈다.

'치고받는다'고 말하는 배우들의 호흡. 황정민은 "스펀지처럼 쫙 받아들였다가 다시 상대에게 내주고. 그랬을 때 느끼는 대단한 희열을 뭐라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내가 잠시 자리를 비워주면 승범이가 들어오고, 승범이가 살짝 비켜서면 내가 들이대는. 그건 아주 미치는 거다"라며 '와이키키 브라더스' 이후 오랜만에 함께 부딪친 류승범과의 연기를 표현했다.

이들의 연기 호흡은 미행 몽타주 신에서 확인할 수 있다.

상황만 주어졌을 뿐 자동차 안에서의 연기는 전적으로 두 사람의 애드리브로 나온 것이다.

이 장면에서 만큼은 어찌나 정겹고 살가운지 도진광과 이상도의 운명공동체가 막바지로 치달았을 때 잠시나마 도진광이 이상도를 인간적인 정으로 바라본 게 아닌가 착각할 정도.

"이상도를 인간적으로 대했다면 마지막 순간 도진광이 그렇게(스포일러를 염려해 밝히지 않는다) 행동할 리 없었겠죠. 감독을 설득했습니다.

도진광이 그 장면에서 이상도를 바라본다면 신파가 된다고. 그냥 제 갈 길을 가는 놈으로 그리자고."

서로 치열하게 이용해먹는 도진광과 이상도의 관계에서 뭔가 인간적인 걸 기대하는 건 황정민과 류승범의 호흡이 그처럼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제3자가 날 바라보는 시선만 변했을 뿐 난 그대로"

'달콤한 인생'과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그리고 '너는 내 운명'을 거치며 황정민은 작년 한 해 가장 괄목할 만한 성장을 한 배우로 떠올랐다.

언제 황정민에게 이렇게 눈부신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던 적이 있었나.

"'로드무비'를 찍었을 때나, 지금 '사생결단'을 찍었을 때나 황정민은 똑같습니다.

제3자가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을 뿐이죠. 때문에 덩달아 내가 그 장단에 맞춰 춤출 이유는 없다고 봐요."

좋은 평 들으면 감사하고 어깨에 힘이 들어갈 때도 있지만 그는 "건방과 오만을 경계한다"고 했다.

주연배우라면 어깨의 짐처럼 여기게 되는 흥행에 대한 부담. 그는 자기가 살기 위해 그것만은 느끼지 않으려 한단다.

"작품을 놓고, 내가 연기해야 할 인물을 놓고 하는 고민만 해도 머리가 터져 죽을 지경입니다.

근데 흥행 부담까지 생각하라니요? 에이, 전 못해요.

그건 제작자와 마케팅 담당자 보고 좀 알아서 해달라고 하세요."

고개와 손까지 저어가며 완강히 거부한다.

배우인 그가 할 수 있는 건 결국 작품으로 보여주는 것.

"저도 숀 펜 나오는 영화는 무조건 보려 해요.

그러나 보다 보면 숀 펜을 보는 게 아니라 숀 펜이 연기하는 인물을 보고 있죠. 마찬가지일 거예요.

관객도 황정민을 보러왔다가도, 황정민이 연기하는 인물을 볼 겁니다.

그러니 작품을 잘 선택해서, 연기를 잘 하는 것만이 배우인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해요."

어린 연극배우 시절, 김민기 선생의 '천천히, 천천히'라는 말이 새삼 와닿는 요즘이다.

그땐 몰랐다.

왜 다 아는 것도 천천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했는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 비슷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작업을 하게 됩니다.

그러는 동안 배우로서 존재감도 느끼고, '아, 내가 공동창작하는 사람이구나, 나도 대중예술을 하는 한 사람이구나' 그런 뿌듯함과 자긍심도 생겨요.

이 맛에 하는 거죠."

한 작품을 하고 나면 정신없이 앓는다는 배우 황정민. 그래서 응급실에 실려간 적도 있을 만큼 자신이 선택하는 작품에 모든 것을 다 쏟아붓는 그가 선택한 작품이라면 밑도끝도 없이 믿어봄 직하지 않은가.

(서울연합뉴스) 김가희 기자 kahee@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