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길이 먼데 우왕좌왕하고 있으니….지금 현대차그룹은 말 그대로 '일상적인 업무'만 처리하고 있어요.

총수의 결단이 필요한 진짜 현안들은 모두 '올 스톱' 상태입니다."


정몽구 회장이 구속된 지 10일이 지나면서 현대차그룹의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

겉으로만 멀쩡할 뿐 속으로 골병이 들고 있기 때문이다.

현상만 간신히 유지한 채 주요 현안에 대한 의사결정을 나중으로 미루는 등 글로벌 기업이 한순간에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식물기업' 신세로 전락했다.

8일 현대차그룹에 따르면 정 회장의 부재로 그가 직접 챙겨온 경영전략회의와 품질회의 등이 겉돌면서 경영 현안 처리가 미뤄지고 신차 개발 일정이 차질을 빚는 등 곳곳에서 누수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실제 정 회장 구속 이후 처음 열린 지난 1~2일 현대차와 기아차 경영전략회의에서 이 같은 분위기가 두드러졌다.

정 회장을 대신해 김동진 부회장(현대차)과 이전갑 부회장(기아차)이 주재한 회의에서는 생산 판매 등 일상 업무만 의제로 올랐을 뿐 현대차 체코 공장 건설과 기아차 미국 조지아주 공장 기공식,독일 월드컵 마케팅 등 긴박한 현안은 논의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신차 개발 등 굵직굵직한 사안을 결정하기 위해 두 달에 한 번씩 열어온 상품기획위원회도 파행을 겪고 있다.

오는 29일 회의 일정이 잡혀 있지만 정 회장이 없는 상태여서 개최 여부조차 불투명하다.

현대차 관계자는 "상품기획위원회에서 신차 출시를 결정하면 18~20개월 후 새차가 나온다"며 "이 회의가 제대로 열리지 않으면 적기에 신차를 내놓기 어렵다"고 말했다.

정 회장 구속을 며칠 앞둔 지난 4월 말 열린 품질전략회의도 정 회장을 대신해 김동진 부회장이 주재했지만 겉돌 수밖에 없었다.

현대차가 도요타의 고급 브랜드인 렉서스를 따라잡기 위해 추진 중인 'BH(프로젝트명) 개발 프로젝트'도 전면 멈췄다.

이 프로젝트는 그동안 정 회장이 사소한 부분까지 일일이 챙겨 왔었다.

이달 1일부터 시판 예정이던 신형 아반떼(프로젝트명 HD)도 노사간 이견으로 양산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수백억원을 쏟아부은 월드컵 마케팅도 심각한 차질을 빚고 있다.

현대차는 지난 5일(현지시간) 독일 프랑크푸르트 월드컵 경기장에서 공식 지원 차량 1250대의 전달식을 가졌지만 실무자들만 참석하는 '작은 행사'로 치렀다.

당초 참석하기로 했던 정 회장의 구속에다 정의선 기아차 사장 등 수뇌부가 출국금지로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현대차는 또 국내에서 벌이려던 '시민과 함께하는 월드컵 페스티벌'도 취소했고 해외에서 진행하려던 판촉행사도 축소하기로 했다.

이달 중순 이집트 카이로에서 열 계획인 아프리카 및 중동지역 딜러 세미나도 수뇌부 대신 실무자급만 파견하기로 했다.

지난달 19일 발표한 사회공헌의 세부 추진계획도 표류하고 있다.

글로비스 주식 사회 헌납이나 윤리위원회 신설,기획총괄본부 축소 등은 사안의 성격상 정 회장이 없이는 세부 계획을 수립·추진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정 회장 구속 이후 신차 개발에서부터 품질 평가,양산,마케팅 행사 등 경영의 전 과정에 걸쳐 연쇄적인 부작용이 일어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건호·오상헌 기자 leek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