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30년쯤 지나면 우리 같은 오너 기업인들은 사라질 겁니다.

상속세율이 50%나 되잖아요."

지난 3월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단 회의를 마치고 나오던 모 중견그룹 회장은 경영권 승계작업 진행 상황을 묻는 기자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당대의 승계는 그럭저럭 이루겠지만 후대는 어렵지 않겠느냐는 얘기였다.

일부 대기업이 나름대로 아이디어를 짜낸 승계방안이 모두 물의를 일으킨 마당에 무슨 뾰족한 수를 찾을 수 있겠느냐는 푸념도 덧붙였다.

그는 "생각해 보면 참 답답할 때가 많아요.

죽을 힘을 다해 기업을 키우면 역설적으로 상속이 불가능해져요.

이런 분위기에서 젊은 사람들이 창업을 하고 위대한 기업인이 되겠다는 야심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반문한 뒤 "지금과 같은 상속·증여세 체계 아래에서는 기업을 키워봐야 결국에는 경영권을 포기해야 하는 지경에 이른다"고 토로했다.

○"소유욕 박탈하면 기업 의욕 사라져"

탄식에 가까운 노(老)회장의 얘기는 요즘 국내 대기업들이 처한 현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최고 세율 50%의 세금을 내고 자녀들에게 기업을 상속·증여할 경우 지난 40∼50년간 유지해온 경영권을 보전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정부는 대기업 총수일가들이 고작 4.94%(38개 기업 평균)의 지분으로 그룹 전체를 지배한다고 비판하지만,이 지분의 절반마저 세금으로 내고 나면 무엇으로 경영을 하겠느냐는 반문이다.

실제 한국경제신문사가 24개 오너경영그룹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동부 현대백화점 정도를 제외한 대부분의 그룹들이 경영권 승계작업을 진척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SK 한진 현대중공업 금호아시아나 현대 LS 대림 하이트 동국제강 코오롱 등은 승계작업을 언제 시작할지도 불투명한 상태다.

재계 관계자는 "자본주의의 강점인 사유권,다시 말해 개인의 소유욕을 박탈하면 기업을 키울 의욕이 생기겠느냐"며 "더욱이 주가가 오르면 상속·증여세는 눈덩이처럼 불어나 경영권 승계가 더 어려워지기 때문에 지금 우리나라의 많은 기업인들은 회사를 키워야 하느냐,말아야 하느냐를 놓고 고민하는 웃지 못할 상황에 빠져있다"고 말했다.

○회사를 키운 대가는 세금 폭탄

일부 오너 경영인 중에는 자녀가 어리다는 이유로 지분 증여를 미루다가 땅을 치고 후회하는 이도 있다.

국내 굴지의 제조업체 A사의 대주주인 B씨가 그런 경우다.

그는 2년 전 10%가 조금 넘는 자신의 지분 중 일부를 대학생 자녀들에게 증여하는 방법을 생각하다가 외부의 시선 때문에 시기를 늦추기로 했다.

하지만 그후 회사 주가가 3배 이상 오르면서 자녀들이 부담해야 할 총 증여세가 1300억원에서 4000억원으로 불어나 버렸다.

그동안 모아둔 배당금과 예금,투자용으로 확보해 놓은 부동산 등을 처분하면 몇 백억원 정도는 마련할 수 있지만 4000억원은 우리나라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부자인 B씨도 감당할 수 없는 금액이다.

결국 자녀들에게 회사를 물려주려면 B씨 일가는 보유주식을 팔아서 세금을 충당할 수밖에 없다.

이 경우 B씨 일가의 지분은 6∼7% 언저리로 떨어져 경영권 유지가 어렵게 된다.

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려 세금을 내면 지분율 하락은 막을 수 있겠지만 차입금 상환 부담을 안고 가야 한다.

회사를 키운 결과 주가가 올랐고,그 대가로 지분 승계가 어려워진 셈이다.

B씨 자신도 과거 선대 회장으로부터 현 지분을 물려받는 과정에서 은행으로부터 빌린 돈을 아직도 갚고 있는 처지다.

B씨의 한 측근은 "배당금 중 상당 액수가 융자금의 원리금 상환에 들어가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오너가 경영권을 유지하는 일은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