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산업개발이 인수한 영창악기의 경영을 박병재 현대산업개발 고문이 맡게 됐다.

현대산업개발은 22일 서울 삼성동 본사 사옥에서 법정관리 기업인 영창악기 인수 본계약을 체결하고 박병재 고문이 새 CEO(최고경영자)를 맡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박 고문은 현대자동차에서만 35년을 근무하다 2003년 부회장으로 퇴임한 전문경영인이다.

조만간 법정관리가 해제되는 대로 공식 취임할 박 고문으로부터 회사 인수에 얽힌 뒷얘기와 향후 경영 구상을 들어봤다.

영창악기 우선협상 대상자 발표가 난 지난 3월 초,정몽규 현대산업개발 회장은 박병재 전 현대자동차 부회장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당시 박 전 부회장은 현대차 퇴임 후 잠시 몸 담았던 현대정보기술 회장직에서 물러나 모 대학에 출강 중이었다.

'무슨 용무일까' 궁금해 하며 찾아간 박 전 부회장에게 정 회장은 영창악기의 경영을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

뜻밖의 제안에 박 전 부회장은 대뜸 "건설회사가 왜 악기회사를 인수하려는 겁니까"라고 되물었다.

정 회장은 "아파트가 추구하는 '안락한 가정'과 '삶의 질'이라는 이미지는 '음악'과 서로 통하는 데가 있지 않느냐.악기 사업을 잘 살리면 아파트 브랜드 '아이파크'의 가치를 더욱 높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 회장의 이런 설명에 박 전 부회장은 "영창악기를 내 경영 인생의 마지막 작품으로 키워 보겠다"며 현대산업개발 고문 겸 영창악기 인수단장을 맡아 '작품 구상'에 들어갔다.

◆우물 안 개구리 벗어나야

박 고문이 영창악기 인수단장으로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마침 독일에서 열린 국제 악기박람회 참관이었다.

수행원도 없이 혼자 박람회장을 샅샅이 훑은 후 내린 결론은 "국내 악기산업은 '우물 안 개구리' 수준"이라는 것이었다.

특히 현대차 공장장을 지냈던 그의 눈에는 야마하 등 세계적 업체들과의 마감처리 기술 차이가 확연히 들어왔다.

서울로 돌아온 박 고문은 곧바로 현대자동차 시절 쌓았던 일본 재계의 인맥을 찾아 나섰다.

이들을 동원해 야마하 공장을 견학하기 위해서였다.

야마하는 연 3조~4조원의 매출을 올리는 세계 최대 악기제조 업체다.

야마하를 견학한 박 고문은 "영창악기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공정 자동화 수준을 높이는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그는 "당장 톈진의 피아노 공장과 비교해 보니 야마하에서는 기계가 하는 작업을 일일이 수작업으로 하고 있어 효율과 정확성이 떨어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며 "즉시 해당 공정을 자동화하도록 실무진에 지시했다"고 설명했다.

◆해외 영업망 회복도 과제

제조 공정 개선과 함께 박 고문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또 하나의 과제는 해외 영업망 복구 작업이다.

영창악기는 2004년 3월부터 약 6개월간 삼익악기가 인수해 경영했다. 이 기간 중 삼익악기측이 미주지역의 영업망을 자사로 일원화하는 바람에 독자적인 해외 영업에 차질을 빚었다.

박 고문은 "미국 현지 법원에 소송을 제기해 그동안의 영업 실적에 대해 삼익악기로부터 정산을 받을 수 있게 됐다"며 "현대차에서 쌓은 수출 영업의 노하우를 이용하면 영창악기의 영업망 복구도 곧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영창악기를 야마하의 경쟁업체로

박 고문은 자동차업계에서만 30년 넘게 잔뼈가 굵은 '자동차맨'이다.

현대차 경리에서부터 최연소 임원,공장장,해외 현지법인 사장과 대표이사 부회장까지 그의 평생은 현대차와 함께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박 고문에게 악기사업은 어울리지 않아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박 고문의 생각은 다르다.

"각종 부품들 간의 섬세한 조율을 통해 좋은 자동차가 탄생하듯 악기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박 고문은 "현대차가 도요타와 어깨를 겨루는 글로벌 플레이어로 성장한 것처럼 영창악기도 야마하와 대적할 수 있는 종합 악기 제조·판매 업체로 키워 보겠다"는 말로 이런 자신감을 표현했다.

김현지 기자 nu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