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도영 <서울시립대 교수·도시사회학>

여섯시 반 자명종 소리에 눈을 뜬다.

이제 여름이 다 되어서 새벽부터 세상이 훤하게 밝다.

5분만 더 꿀맛같은 잠결 속에 몸을 맡기고 싶다.

근데,아 참,그렇지.오늘은 지방선거 투표일이다.

가장 바쁜 수요일 아침에 갑자기 찾아온 강제된 여유가 싫지 않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어디 놀러갈 계획이라도 좀 짤 걸.어제 저녁까지도 정신없이 뛰다가 늦게 귀가해 곯아 떨어졌으니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도 오늘은 나 스스로 내가 사는 이 도시의 미래를 결정하는 데 직접 참여하는 몇 안되는 날 아닌가.

비록 모범시민은 아니지만 내 최소한의 기본 권리와 의무는 행사하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스친다.

사실 지난 몇 주간의 선거유세는 좀 피곤한 감도 없지 않았다.

특히 지난 일주일은 사무실이고 시장골목이고 동네 어귀 여기저기 가릴 것 없이 소란하고 북적대는 분위기였다.

도시 전체가 축제판이 벌어진 것 같았지만,달리 보면 축제판의 주인공인 우리는 막상 멀찌감치 비켜서고 거기서 좌판을 벌인 상인들이 홍보물을 나눠주고 물건을 파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기도 했다.

현수막의 구호들도 알쏭달쏭하고 말이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출근길 지하철 타러 가는 길목을 지키고 서서 끈덕지게 명함을 손에 쥐어주는 이들이다.

똑같이 맞춰 입은 울긋불긋한 티셔츠에 모자를 눌러쓰고 나와 "안녕하십니까,기호 몇 번 아무개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하고 외쳐대는 아주머니들. 명함과 홍보전단에 글자들은 빼꼭하지만 다 엇비슷해서 차이를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

선거 운동하는 저 분들이 생각하는 진짜 자기 후보 출마의 변은 무엇일까? 한번은 답답한 마음에 바삐 가던 걸음을 멈추고 그분들에게 물어보았다.

"그러니까 공약 중에서 핵심적인 내용이 뭐지요?" 예상치 못한 질문을 만난 그들은 말문이 막힌다.

이런 것은 각본에 없었는데.어차피 우리는 돈 받고 아르바이트 나온 사람들 아닌가.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발걸음을 다시 옮기려는 순간 한 사람이 생각났다는 듯 외친다.

"저… 그… '♥♥구의 가치를 두 배로!'하는 그거요…." 우리 구의 가치를 두 배로 만들자고? 부동산 값 담합해서 올리자는 얘기인가? 알쏭달쏭 망연자실하다.

공약을 다시 따져 물은 내가 이상한 사람인가?

예전에 다른 나라에서 온 한 친구와 얘기를 하다가,그 친구가 테이블 위에 놓인 신문의 1면을 가리키며 저게 무슨 사진이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것은 의안가결을 강행하려는 쪽과 저지하려는 양측 국회의원들이 거칠게 몸싸움을 하는 사진이었다. 나는 창피해서 얼버무리고 말았다. "응,그거 별 것 아니야. 우리나라 정치 수준이 아직 갈 길이 멀지 뭐." 하지만 그 친구는 정색을 하며 오히려 그 장면을 부러워했다.

너희 나라에는 그래도 치고받고 싸우는 민주주의가 있구나 하고 말했다.

의견대립도 있고 진짜 투명한 투표도 있구나 하면서 선망의 표정을 지었다.

그때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우리가 지금 얻은 이 선거라는 것이 얼마나 힘든 역사를 거치면서 얻어낸 시리도록 소중한 것인가를.

집 나서기 전, 집에 배달된 선거공보를 다시 한번 훑어본다.

이 사람 직업은 뭐지? 투명한 살림이라고? 진실성이 있어 보이나? 기본 소양과 능력은 있어 보이는가? 이 사람들한테 내 가족이 사는 지역의 살림과 앞날을 맡겨도 되나? 투표장에 들어선다.

그래,어렵지만 그래도 한번 그 중 가장 괜찮아 보이는 사람을 골라내보자.내 대신,정말 우리 동네 살림을 조금이라도 낫게 해 줄 사람을 찾아보자. 결국 이 한 표의 결과는 모두 다시 나와 내 사랑하는 가족에게로 돌아올 것이다.

그래서 이 한 표는 처절하도록 소중하고 신성하다.

책임은 회피할 수 없다.

내가 사는 작고도 큰 세상의 운명을 결정짓는 일이 내 손 끝에 달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