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미 FTA 통신협상 세미나에 토론자로 참석한 적이 있다.

한·미간 본협상이 곧 열리게 돼 있어 미국이 들고 나올 이슈들을 논의해 보자는 자리였다. 그러나 시작부터 분위기가 꼬였다. IT연맹 등에서 나온 사람들이 한·미 FTA 반대론자는 한 사람도 없다며 문제를 제기했다. IT강국이라 통신분야는 전향적일 줄 알고 갔다가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참을 만했다.

주제발표와 토론에서 미국이 제기할 것으로 예상된 이슈는 크게 네 가지. 첫째, 미-모로코, 미-오만 FTA 사례에 비추어 미국이 자국 규제체계를 관철시키려 들 것이라고 했다. 둘째, 각 통신사업자가 기술선택의 자유를 가져야 한다는 조항을 요구할 것이라고 했다. 셋째, 기간통신사업자에 대한 외국인 투자제한의 완화 내지 철폐를 주장할 것이란 얘기다. 마지막으로 통신·방송 융합흐름을 이용, 미국이 통신시장을 넘어 방송시장에 대한 규제완화를 압박할 것이란 예상이다.

먼저 통신규제 체계를 보자. 누구나 상대국에 자국 시스템을 강요하면 기분 좋을 일은 아니다. 하지만 한·미 FTA를 떠나 우리나라 규제체계는 과연 선진적인가.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란 것은 익히 아는 사실이다. 시장과 기술변화에 전혀 맞지 않거나 규제가 너무 자의적이라는 비판에서부터 통신규제기관이 독립성이 과연 있는지에 이르기까지 수도 없이 많다. 통신규제체계는 한·미 FTA와 상관없이 달라져야 한다.

기술표준의 민간자율 선택은 어떤가. 혹자는 미국의 이런 요구를 들어주면 CDMA 같은 성공신화는 앞으로 기대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건 웃기는 소리다. 과거 방식이 앞으로도 통하리란 보장도 없고,언제까지 정부가 나서서 도박을 벌일 수도 없는 일이다. 게다가 실패하면 정부가 모두 책임을 질 것도 아니지 않은가. 정부는 상호호환성, 중복투자 방지 등을 말하지만 그것은 시장경쟁을 통해서도 해결할 수 있다. 이 역시 한·미 FTA를 떠나 우리 스스로 고민할 때가 됐다. 세계적인 IT 테스트베드가 되고 싶다면 더욱 그렇다.

다음은 외국인 지분문제다. 미국도 일부 통신분야에 대해선 지분제한이 있어 일방적으로 요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냉정히 생각해 볼 게 있다. 한·미 FTA를 떠나 외국인 지분제한이 49% 이하면 통신주권이 지켜지고,그것을 넘으면 무너진다는 고정관념이다. 통신주권이 정말 중요한 이슈면 지분제한이 아니라 경영권 보호 장치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하는 것 아닌가.

마지막으로 방송시장이다. 방송시장은 통신시장에 비해 왜소하기 짝이 없다. 통신시장이 비약적으로 커진 탓도 있지만 그동안 공익성을 앞세워 시장을 고수하려는 방송의 폐쇄성과 자본이 흘러들어가지 못한 것의 당연한 결과다. 한·미 FTA를 떠나 방송시장은 달라져야 하고, 통방융합도 더는 지체돼선 안된다.

결론적으로 통신분야를 사례로 들었지만 꼭 한·미 FTA가 아니더라도 우리 스스로 결단을 내려야 할 것들이 적지 않다. 문제는 한·미 FTA가 여기에 긍적적인 방향으로 '작용'하면 좋은 일이지만 그 반대일 경우다. 미국이 제기하는 이슈라는 이유만으로 우리가 수세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거나 오히려 '반작용'이 가해진다면 그것처럼 역행적인 것도 없다.

논설위원·경영과학博 a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