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계섭 < 서울대 교수·경영학 >

한국은행에 따르면 1분기 실질 국민 총소득이 전 분기에 비해 0.6% 감소해 1년 만에 마이너스로 돌아섰다.

1분기 성장률은 전 분기 대비 1.2%를 기록,작년 4분기 1.6%에 비해 크게 꺾였다.

이런 추세라면 정부가 공언했던 올해 5% 성장은 어려울 것이라는 것이 국내외 민간 경제연구소들의 진단이다.

하지만 5·31 지방선거 참패를 경험한 여당의 촉구에도 불구하고 청와대는 성장을 높일 수 있는 정책을 내놓지 않고 있다.

성장은 경제 정책의 우선 순위에서 뒷전에 놓여 있다.

왜 그럴까?

첫째,독특한 시대 배경 때문이다.

정권의 핵심 인사들은 대부분 우리 경제가 고속 성장을 하던 시대에 자라났다.

이들은 민족 역사에서 처음으로 어린 시절에 보릿고개를 경험하지 않았다.

굶주림은 남의 나라 이야기였다.

그 후 경제는 연평균 약 9%라는 경이적인 성장을 계속했다.

대학만 졸업하면 직장을 골라가는 거의 완전 고용 상태가 계속됐다.

경제 성장은 필사의 노력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주어지는 것이라고 믿을 만했다.

둘째,좌파 정치경제학에는 성장이라는 개념이 없다.

1980년대에 학생 운동을 하면서 거치기 마련인 이념 학습에서는 오로지 '착취'가 있을 뿐이다.

제국주의론과 세계 체제론에 따르면 우리나라와 같은 주변부 국가들 내에서 이뤄지는 경제 활동의 결과물은 이른바 매판자본과 제국주의자들이 긁어간다.

이들에 따르면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경제성장은 결국 자본가들의 배만 불려주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정권 핵심 인사들은 성장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을 수 있다.

저성장에 대해 비판을 하면 쿠데타로 집권한 세력이 유포한 '성장 이데올로기'에 아직도 젖어 있느냐고 거꾸로 화를 낼 수도 있었다. 아무런 거리낌없이 "세계 10대 경제 대국인 우리 경제 규모로는 지금의 경제 성장률도 대단한 것"이라고 자화자찬을 할 수 있었다.

대단히 유감스러운데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대다수 국가들에서 성장은 아주 중요한 정치 이슈다.

국가 경제에서 정부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작은 영국과 미국 같은 나라들에서도 성장률과 고용,물가 등 주요 경제지표가 발표되기 직전부터 정치권은 긴장한다.

지표가 기대에 못 미치면 야당은 지체없이 여당을 공격하고 여당은 곧 개선할 것을 약속한다.

정치인들은 집권에 앞서 달성하고자 하는 국가 경제 비전을 제시하고,이를 달성하지 못하면 표로 심판을 받는 정치문화가 뿌리깊다.

둘째,우리 경제는 도약과 추락의 갈림길에 서 있다.

정부 관계자들은 우리 경제 규모가 커져서 이제 고속 성장은 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우리 경제 규모보다 약 10배 큰 미국은 지난 분기 5.3% 성장을 기록했다.

하이테크 산업과 지식 산업을 필두로 한 첨단 서비스 산업의 약진이 큰 힘이 됐다.

기존의 성장 이론으로는 쉽게 설명이 되지 않는 새로운 성장 패러다임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인도와 중국 등 후발 국가들은 가공할 속도로 우리를 추격하고 있다.

이들 국가에서 만들어진 내구 소비재들이 우리의 주요 수출 시장은 물론이고 내수 시장에서도 우리 제품들을 위협하기 시작하고 있다.

6·29 선언으로 민주화가 시작된 지 18년, 젊은 시절의 반권위주의 운동 경력이 정치인의 자질을 평가하는 유일한 잣대이던 시대는 이제 저물고 있다. 국민들은 민주적인 제도와 절차를 통해서도 권위주의 시대에 버금가는 성장을 이룩할 수 있는 리더의 탄생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다른 선진 민주주의 국가에서처럼 집권 전에는 정치인들이 서로 다른 성장의 비전과 방법론을 제시하고 토론하다가도 집권 뒤에는 비전을 현실화시키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