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월드컵 조별 예선이 종반에 접어든 가운데 지난 30년 넘게 '최고의 선수'를 상징했던 10번의 영광이 사라져가고 있다고 브라질 일간 폴랴 데 상파울루가 20일 보도했다.

'펠레 넘버'로도 일컬어지는 10번은 대표팀이나 프로팀을 막론하고 경기를 풀어가는 플레이 메이커이자 높은 득점력까지 갖춘 핵심적 역할을 하는 선수에게 주어지는 번호.
이 때문에 축구선수라면 누구나 10번을 받고 싶어하며, 10번을 단 선수는 번호가 주는 무게감 하나만으로도 모든 축구경기에서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독일월드컵 본선 참가국을 보더라도 세계 최강 브라질의 호나우지뉴, 프랑스의 지단, 이탈리아의 토티, 잉글랜드의 오웬 등이 10번을 달고 뛰고 있다.

그러나 이번 독일월드컵을 거치면서 그 의미가 상당부분 퇴색했다는 것이 신문의 분석이다.

신문은 그 근거로 조별 예선 2라운드 경기가 끝난 19일 현재까지 터진 75골 가운데 10번이 넣은 것은 고작 7%에 해당하는 5골에 그치고 있다는 점을 들었다.

물론 '요주의 대상 1호'인 탓에 각 팀의 견제가 그만큼 심하다는 이유도 있으나, 이 같은 사정을 감안하더라도 너무나 형편없는 득점력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인지 호나우지뉴의 경우 10번의 역할 변화를 예감하기라도 한 듯 월드컵이 시작되기도 전에 일찌감치 자신의 역할을 "골잡이들이 골을 넣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라고 규정하는 발언을 했다.

스페인 명문 FC 바르셀로나에서 화려한 전성기를 맞고 있는 호나우지뉴는 "10번은 나에게 매우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것은 나의 오랜 꿈이었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왔다.

이 같은 바람으로 지난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11번을 달고 뛰었던 호나우지뉴는 이번 독일월드컵에서 10번으로 '승격'했지만, 아직까지 이렇다할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다른 선수들의 사정은 더 심각하다.

한국과의 경기에서 1대 1로 무승부를 기록한 프랑스 대표팀의 지단은 '아트사커의 자존심'이라는 표현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16강행을 예약한 잉글랜드 대표팀에서도 오웬의 활약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처럼 10번들이 전반적으로 부진을 면치 못하면서 각 팀의 스타 플레이어인 10번을 내세워 대대적인 광고를 한 나이키, 아디다스, 퓨마 등 월드컵 후원업체들이 마케팅 전략 차질로 울상을 짓고 있다는 소식도 전해지고 있다.

'10번의 영광'은 잘 알려진 것처럼 펠레로부터 시작됐다.

1970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10번을 단 펠레의 활약으로 브라질이 월드컵 3회 우승을 달성하면서 10번은 '대표 중의 대표'선수를 의미하는 코드가 됐으며, 이후 30년 이상 그 전통이 이어졌다.

브라질 내 축구 전문가들은 그러나 10번의 영광이 쇠락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부터라고 주장하고 있다.

펠레, 리벨리노, 지쿠로 이어지던 10번은 브라질이 8강 문턱에서 주저앉은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의미를 찾아보기 어렵게 됐으며,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브라질이 우승을 차지했을 때 우승 주역 호마리우는 10번이 아니었다.

이어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똑같이 10번을 단 브라질의 히바우두와 프랑스의 지단이 결승에서 만나 10번의 영광이 부활하는 듯 했으나,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는 히바우두 대신 호나우두(9번)와 호나우지뉴(11번)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사그러들었다.

신문은 이번 독일월드컵의 특징 가운데하나가 "10번이 단순히 '골잡이를 위한 도우미'로 그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제 조별 예선 2라운드를 끝낸 독일월드컵은 아직 많은 경기를 남겨놓고 있다.

각 팀의 10번들이 앞으로 남은 경기에서 명승부의 주역으로 등장해 10번의 영광을 재현할지, 아니면 10번을 대체하는 또 다른 영광의 번호가 탄생할 것인지를 지켜보는 것도 월드컵의 재미를 더하는 요소다.

(상파울루연합뉴스) 김재순 통신원 fidelis21c@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