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등록번호 뒷자리의 첫 숫자를 바꿀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타고난 성(Sex) 대신 사회적 성을 의미하는 젠더(Gender)를 인정해야 한다는 최고 재판부의 판결이 나왔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성전환자들의 호적상 성별 정정 여부는 재판장에 따라 들쭉날쭉했지만 이를 일률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법적인 잣대가 처음 생긴 셈이다.

◆XX염색체도 호적상 남성 가능

현행 민법이나 호적법에서는 성의 개념을 별도로 규정하지 않고 있다.

다만 과거부터 성염색체를 성별의 절대적 기준으로 삼는 '생물학적 성'의 개념이 통용돼 왔다.

'XY염색체=남성,XX염색체=여성'은 불변의 진리였다.

성은 출생과 동시에 결정돼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 이후 육체적 정신적으로 완전한 여성인 데도 호적상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군에 입대해야 하는 등 사회적 불편을 호소하는 목소리들이 커져갔다.

특히 2002년 12월 연예인 하리수씨에 대한 호적정정 허가를 기점으로 찬반을 둘러싼 사회적 논란이 정점에 달했다.

찬성론자들은 "성전환증은 동성애나 이성복장 등 기호의 문제가 아니며 일반 정신질환과도 구분되는 특이한 병적 현상"이라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반대론자들은 "창조자는 성의 문제에 대해 인간에게 선택권을 부여하지 않았다"고 맞서왔다.

이에 대해 대법원은 22일 찬성론자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재판부는 "출생시에는 그 사람의 정신적,사회적 성을 인지할 수 없으므로 통념상 생물학적 성에 따라 법률적 성이 평가되지만 이후 한결같이 생물학적 성에 불일치감과 위화감을 갖고 반대 성에 귀속감을 느끼면서 신체적,사회적 영역에서 전환된 성 역할을 수행한다면 전환된 성이 성전환자의 법률적 성이라고 평가받을 수 있다"고 판시했다.

대법원 판결은 세계적인 흐름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유럽에서는 1972년 스웨덴이 성전환자의 성별 정정을 입법으로 허용했고,영국과 일본도 2004년 이를 허용하는 법을 제정했다.


○권리와 의무는 그대로 유지

대법원은 성전환자의 호적정정에 까다로운 요건을 제시하고 있다.

정신과적으로 의사로부터 성전환증 진단을 받아야 하고,수술 후 자신을 바뀐 성을 가진 사람으로 인식하면서 외관과 성관계,직업 등도 바뀐 성에 따라 활동해야 한다.

성전환자가 호적에 기재된 성을 법원의 허가를 받아 바꿨더라도 이전 성(性)으로서 갖고 있던 권리와 의무는 그대로 유지된다.

예를 들어 결혼을 해서 자식을 낳은 남성이 성을 전환해 여성으로 호적을 고치더라도 결혼한 여성이나 자식들과 법률적 관계는 여전히 '남편'이고 '아버지'인 것이다.

이번 판결에도 불구,애매한 부분이 남는다.

여성으로 전환한 남성을 강간한 경우 강간죄가 성립하는지,동성 간 혼인을 허용하지 않는 우리 법체계상 기혼자가 성전환했을 때 기존 혼인관계를 유지할 수 있느냐는 등의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종교계는 이번 판결이 동성애자 간의 결혼에 대해 관대한 사회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남성→여성의 경우 병역 면제

병무청은 대법원의 이날 결정에 따라 앞으로 남성이 여성으로 호적상 성별을 바꾸면 징집 대상자에서 제외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병무청 관계자는 "남성에서 여성으로 호적상 성별이 바뀌면'병적 제적자'로 분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이어 "여성에서 남성으로 호적상 성별이 바뀌면 병역의무 이행 대상자로 분류돼 징병검사를 받아야 하며 외관상 증상에 따라 신체등위가 결정된다"고 말했다.

김병일·김현예 기자 kb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