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지표대로라면 현직 경영자 중에는 국내 최대의 정유사를 이끌고 있는 신헌철 SK㈜ 사장(61)이 첫 손가락에 꼽힌다.
갑작스런 아버지의 죽음,홀어머니 밑에서 좀처럼 벗어날 수 없었던 가난과 결핍,성실한 준비에 뛰어난 실력을 갖고도 대학입시에 두번이나 낙방했던 불운,예기치 않은 사태로 7개월이나 늘어나버린 군복무….
유년은 불우했고 청년기 또한 눈물과 좌절이 지배했다.
같은 또래의 친구들이 철없이 뛰어놀던 해운대 바닷가는 조숙한 신 사장에게 세월의 신산(辛酸)을 곱씹게 만드는 풍경에 불과했다.
그래도 그는 꺾이지 않았다.
부족하거나 모자라는 것은 그대로 참고 도중에 길이 막히면 돌아가고자 했다.
산산이 조각난 꿈의 파편들을 집어들고 절망하거나 잠들지 않았다.
대신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애썼다.
해산물 수송업에 종사했던 신 사장의 부친은 1955년 사망했다.
신 사장이 해운대초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가세가 급격히 기운 것은 불문가지.그 시절의 가난한 학생들이 대개 그랬듯 신 사장도 은행원이 되겠다는 꿈을 안고 상고에 진학했다.
부산상고 시절 반에서 1,2등을 다툴 정도로 공부를 잘했던 그는 당시 부산출신의 기업가 김지태씨가 운영하던 '백양장학회'의 장학생이 됐다.
이 때 같이 장학금을 받았던 사람들이 동기인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1년 아래의 이학수 삼성 구조조정본부장,2년 아래의 노무현 대통령이었다.
그러나 운명은 그에게 편안한 길을 안내하지 않았다.
1963년 겨울,지금도 절친한 친구인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와 함께 서울대 상대에 도전했으나 낙방의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
당시 서울대 상대에 수석 입학했던 이 총재는 "헌철아,너무 실망말거라.내년에 시험 다시 쳐서 서울에서 만나자"고 위로했지만 1964년의 재도전에서도 그는 실패했다.
"국어시험에 이효석의 단편 '메밀꽃 필 무렵'을 다룬 문제가 나왔습니다.
상고를 다닌 탓에 한 번도 접하지 못한 작품이었어요.
눈앞이 캄캄하더군요."
지난 수년간 죽을 힘을 다해 학업을 뒷바라지했던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리며 울었다.
자신보다 못한 학교 성적으로도 너끈히 합격했던 친구들을 보며 자신의 불운을 한탄했다.
다시 1965년 겨울.절치부심의 세월을 보낸 터였지만 이번에도 낙방하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감에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예감은 불길했고 몸은 눈에 띄게 수척해졌다.
'안전하게' 연세대나 고려대를 지원할 수도 있었으나 사립대학은 등록금 부담이 너무 컸다.
결국 귀착지는 부산대 상대였다.
"모든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고 결론 내렸어요. 어떤 대학이든 '내가 하기 나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대학생활은 즐겁지 않았다.
2년을 허송세월했다는 자책감이 찾아왔다.
결국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해병대(179기)에 자원 입대하게 됐다.
해병대를 지원하게 된 동기는 단순했다.
육군보다 복무기간이 2개월 정도 짧아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입시에 찌들 대로 찌든 그가 해병대의 강도 높은 훈련을 이겨내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그의 인생 스케줄은 제대를 4개월 앞둔 1968년 1월 김신조가 청와대를 습격하면서 또다시 구겨졌다.
전 사병의 제대가 무기한 연기된 것.뒤이어 8월에 실미도 북파공작원의 서울 진격 사건,10월에 울진 무장간첩 사건이 잇따라 터지면서 정신없이 '뺑뺑이'를 돌아야 했다.
결국 복무예정 기간 26개월보다 7개월이 많은 33개월이 지나서야 군복을 벗었다.
"마음을 비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세상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는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을 가슴 깊이 새기며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지요." 지금의 신 사장은 잇따른 대입 낙방과 해병대 생활을 "내 인생 최대의 비료"라고 말한다.
고통을 참고 어려운 세월을 인내하는 지혜를 배우지 않았더라면 오늘날의 성취와 보람을 맛볼 수 없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신 사장이 젊은 고뇌를 바쳐 갈고 닦았던 역량은 1972년 대학 졸업과 함께 입사한 대한석유공사(SK㈜의 전신)에서 만개했다.
1973년 4개의 정유사 간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던 해인사 주유소 개발권을 따낸 것을 시작으로 △1970년대 말 판매기획부장 대행 시절 호남정유(현 GS칼텍스)와의 시장점유 경쟁 승리 △1982년 대전지사장 시절 15개 주유소 및 충전소에 대한 성공적인 투자 등 지금도 회사 내에 전설처럼 내려오고 있는 눈부신 실적들을 쌓아올렸다.
좋은 주유소 자리를 찾아 험한 산자락도 마다않다 보니 죽을 고비도 여러 차례 넘겼다.
1974년엔 빗길에 마산의 한 야산을 올라가던 자동차가 굴렀다.
온 몸의 뼈마디가 부서진 듯 아팠고 차는 박살이 났다.
동료들의 구조를 받아 차에서 몸을 빼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서러워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미래를 함께 가꿔나갈 회사가 있다는 사실이 새삼 고마웠다고 한다.
동료들로부터 받아든 뜨거운 커피 한 잔에 빗방울이 쉴 새없이 떨어졌다.
그래도 달았다.
빗물과 눈물의 이중주가 만들어낸 작은 평화였다.
조일훈 한국경제신문 산업부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