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1990년대를 풍미하다가 한동안 잠잠했던 민중미술이 시장친화적 화풍으로 바뀌면서 새롭게 떠오르고 있다.

한국의 근대화과정에서 나타난 현실의 모순을 노골적으로 비판하는 정치성향의 화풍에서 벗어나 최근엔 민족고유 정서와 일상 풍경을 곁들인 개인적 주제를 담아내며 미술계의 새로운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임옥상을 비롯해 홍성담 강요배 주재환 박흥순 등 민중미술 1세대 작가와 박이찬국 손순옥 설종보 등 30~40대 작가들이 이 같은 변화를 주도하고 있다.

학고재화랑의 우찬규 대표는 "민중미술 작가들이 제도권으로 유입되면서 정치적 이념 등 색깔논쟁보다 시장의 요구에 맞춰 새로운 형식찾기에 골몰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민중미술 대표작가 임옥상씨는 최근 '임옥상미술연구소'를 설립해 서울숲 조각공원 '무장애 놀이터'를 만드는 등 공공미술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분단현실 등 정치ㆍ사회적 이슈를 고발해 온 예전과는 사뭇 달라진 모습이다. 회화보다 조각작품 활동을 더 활발하게 하고 있는 임씨는 이제 시장에서 '잘 팔리는 작가'로 통한다.

제주 출신 민중화가 강요배씨는 과거 칼날같은 비판정신이 배인 화풍에서 벗어나 날로 넉넉해지면서 대상을 끌어 안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지난 4월 인사동 학고재에서 열린 개인전에선 38점이 모두 팔리는 등 컬렉터에게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통일과 노동문제,광주학살 등을 주제로 일그러진 사회현실을 그렸던 홍성담씨는 젊은 세대의 문화코드를 작품에 반영한 케이스.

월드컵을 비판한 '붉은 악마' 시리즈와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세력다툼을 은유적으로 그린 '아바타' 시리즈 등이 주목받고 있다.

'한국 근현대사' 시리즈를 통해 근대화 과정의 개발독재를 비판해온 신학철씨는 농촌의 모내기 등 한국적 정서를 담아내고 있고,양평 가평 등에 거주하는 서민의 애환을 그리는 민정기씨의 야생 꽃그림에선 서정적인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사진작가 손장섭씨는 정치비판적인 타큐멘터리 작품을 뒤로 하고 최근엔 전국의 고목과 해변을 찾아다니며 생명사상을 렌즈에 담아낸다.

이 밖에 국내산수의 절경을 인상주의적 화풍으로 사람들의 감성을 불러내는 박흥순,생활 속의 자본주의 모순을 반짝이나 스티커를 소재로 유머러스하게 표현하는 주재환,평이한 일상을 희화화하거나 풍자하는 안창호씨 등의 작품도 눈길을 끈다.

30~40대 젊은 민중작가들도 상업화랑에서 근작들을 잇따라 선보인다. 박이찬국 김정렬 등 10명은 삶의 문제를 다양한 시선으로 풀어낸 40여점을 '백두대간전(8월2~15일,갤러리 눈)'에서 보여준다.

또 산과 강의 풍경을 통해 한국의 미를 재현한 설종보씨 작품은 부산김재선갤러리(30일까지)에서,전통과 현대를 통일시키기 위한 형식찾기에 골몰하는 손순옥씨 작품은 청주 신미술관(15일까지)에서 만나볼 수 있다.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