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 논설위원.경제교육연구소장 >

"협상은 약간의 쇼와 적당한 거짓말의 연속"이라고 안드레이 그로미코 구 소련 외상은 썼다.

28년 간의 외무장관을 포함해 2차 대전 이후 무려 50년 간이나 외교관 생활을 했던 그로미코였다.

그는 "외교는 때로 국익보다는 협상 자체를 위해 진행된다"고 말했다.

꼬인 협상을 풀기 위해 상대방에게 자기 나라의 약점을 몰래 흘려주는 일조차 흔했다는 것이 늙은 외교관의 회고였다.

한·미 FTA 2차 서울협상이 결국 파행으로 끝났다.

미국이 의약분과를 거부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한국 측은 다른 분과들을 공전시키면서 협상을 파국으로 몰아갔다.

협상을 진행하기에는 서울은 역시 매우 까다로운 장소였을 것이다.

그로미코의 표현대로라면 팽팽한 협상에서 '약간의 쇼'도 없을 수는 없었을 테다.

협상은 때로 그런 묘미로 하는 것이고 파국의 위기감을 적절히 연출하는 것은 협상의 기본 전술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한·미 FTA 협상은 '약간의 쇼와 적당한 거짓말'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돌아가고 있다.

전략이 잘못되어 있다는 느낌도 지울 수 없다.

아니 전략의 잘못이라기 보다는 시장논리와는 줄곧 반대로 걸어왔던 참여정부가 개방협상을 꺼내든 것부터가 문제라면 문제인 본질적 상황으로 되돌아가고 있다.

'미국의 요구'를 앞세워 묵은 과제들을 일거에 해결하려다 보니 미국은 갈수록 악당의 이미지만 뒤집어 쓰고 있다.

상대방의 손을 빌려 내부 문제를 해결하려는 전도된 목표의식이 아니라면 이렇듯 '되면 좋고 안되면 그만인' 식의 협상으로 갈 수는 없다.

돌아보면 1997년 말 IMF 협상 때도 그랬다.

궁지에 몰린 정부 관료들은 IMF의 힘을 빌려 소위 금융 개혁법 따위의 해묵은 과제들을 일거에 해결한 경험이 있다.

"글쎄,그들이 요구한다니깐…!"

지금 미국의 요구사항이라고 되어있는 과제들 중에는 굳이 FTA가 아니더라도 한국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 해결되었어야 할 항목들이 허다하다.

자동차 세제 문제도 그런 사례일 뿐이고 고가 신약을 사실상 차별대우하는 소위 약제비 문제나 서비스 시장 개방 역시 서비스 산업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해서는 먼저 풀었어야 마땅한 분야들이다.

소형차를 우대하는 자동차 세제는 이미 중대형차로 재편되고 있는 국내 현실을 보더라도 진작 고쳤어야 마땅하다.

벤츠 렉서스 등 고가 소형차 판매를 장려하고 있는 '거꾸로' 세제를 고집할 이유는 없다.

세계에서도 가장 엄격한 캘리포니아 환경 규제를 그대로 가져와 법제화해놓은 것 역시 미국의 요구가 아니더라도 우리 현실에 맞는 '적절한'규제로 전환하는 것이 당연하다.

캘리포니아 환경규제는 미국에서조차 소송 중이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터다.

교육이나 법률 의료 등 서비스 시장 개방은 더말할 나위도 없다.

언제까지 특정 집단의 독점 구조를 유지하면서 어학연수며 질병치료 등으로 비싼 달러를 해외에서 탕진하도록 방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허다한 개혁과제들을 여태껏 미루어 온 끝에-아니 반대로 간 끝에-지금에 와서 돌연 한·미 FTA에 걸어 일거에 해결하려다 보니 모든 개혁 고통은 "오로지 미국의 강요 때문"이라는 부정적 인식만 증폭되고 있는 상황이다.

결국 협상이 진행될수록 반미 캠페인은 확산되고 자발적 내부개혁 가능성은 오히려 차단되는 퇴행적 구조만 강고해지고 있다.

미국과의 FTA야 안하면 그뿐이지만 앞으로 그 누구도 이들 개혁 과제들을 쉽게 꺼내들 수 없도록 정치환경이 자승자박 구조로 돌아가는 것은 역시 참여정부의 '악의적 무능'이 빚은 결과다.

개인의 무능은 동정의 대상이지만 정부의 무능은 죄악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갑작스레 한·미 FTA를 꺼내들 때부터 걱정했던 상황(다산칼럼 5월23일자)이 점차 구체화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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