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광그룹의 미디어 사업을 이끄는 진헌진 티브로드(태광그룹 계열의 SO) 사장은 요즘 밤잠을 이루지 못한다.

사업다각화 차원에서 작년 말부터 추진하고 있는 우리홈쇼핑 인수 작업이 생각보다 만만치 않아서다.

거침없는 기업 인수합병(M&A)을 통해 케이블TV방송국(SO) 사업을 국내 1위로 올려놓았지만 처음으로 패배를 경험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에 애태우고 있다는 게 측근들의 전언이다.

태광그룹 이랜드 두산그룹 등 그동안 M&A시장에서 승승장구해오던 이른바 'M&A 지존'들의 '쾌속질주'에 브레이크가 걸리고 있다.

과감한 베팅과 치밀한 전략으로 M&A시장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이들 기업이 최근 추진하고 있는 M&A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

같은 이유로 속앓이를 하고 있지만 세 그룹의 속사정은 제각각이다.

적대적 M&A를 추진하는 태광그룹은 만만치 않은 상대를 만나 고전하고 있는 케이스.작년 말 아이즈비전이 보유하고 있던 우리홈쇼핑 지분 19%를 사들이며 경영권 인수 작업에 착수한 태광은 최근까지 우호지분을 포함해 약 46%의 지분을 확보했지만 상대방인 경방측도 막대한 자금력으로 지분율을 54%까지 늘리는 등 방어막을 두텁게 하고 있다.

이에 따라 우리홈쇼핑 경영권 분쟁은 당분간 답보상태를 보일 전망이다.

경영권 공방이 지속되면서 두 배 가까이 오른 우리홈쇼핑의 몸값도 태광으로선 부담이다.

태광이 아이즈비전으로부터 지분을 살 때만 해도 매입 가격은 주당 5만6000원에 그쳤지만 최근 경방이 우호세력인 전방과 동원산업 보유지분을 매입할 때는 주당 11만원에 거래됐다.

태광이 너무 일찍 적대적 M&A 의도를 드러낸 게 문제였다는 지적이다.

게다가 SO 디지털 전환 비용,파워콤과의 초고속인터넷 가입자 경쟁 비용,케이블TV 가입자 이탈에 따른 추가 마케팅 비용 등 돈 들어갈 일이 한두 군데가 아닌 태광의 고민은 깊어만 가고 있다.

이랜드 그룹의 M&A를 진두지휘해온 권순문 이랜드개발 대표도 요즘 속이 타기는 마찬가지.뉴코아 까르푸 등 대형 유통업체 인수를 잇따라 성사시켜 '유통업계의 M&A 공룡'으로 떠오른 이랜드는 의결권이 없는 법정관리 기업의 주식을 샀다가 낭패를 보고 있다.

국제상사 경영권을 인수하기 위해 2002년에 지분 51.8%를 확보했지만 지난 4월 창원지법이 에너지 회사인 E1을 국제상사 매각을 위한 우선협상대상자로 지정하면서 경영권 장악에 실패했다.

이후 '제3자 매각 작업을 중단해 달라'는 가처분 신청을 냈지만 이마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지난 13일에는 'E1과 공동경영 방안을 창원지법에 제출하겠다'고 발표했다가 E1으로부터 코웃음만 사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세일즈앤리스백,메자닌파이낸싱 등 선진 M&A 기법을 유통업계에서 처음 도입할 정도로 전문성을 뽐내던 이랜드가 왜 의결권도 없는 법정관리 기업의 주식을 사는 '악수'를 뒀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M&A를 통해 식음료 회사에서 중공업 그룹으로 변신에 성공한 두산그룹의 M&A 지휘부도 요즘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오너 일가의 분식회계,횡령,배임에 대한 유죄판결(1심)로 감점을 받아 대우건설 인수에 실패한 두산은 아직 다음 먹잇감을 정하지도 못한 상태다.

해외건설 사업 강화를 위해 현대건설을 인수하고 싶지만 벌써부터 강한 의욕을 보이고 있는 현대가(家)를 따돌릴 수 있을지 미지수다.

내년께 매물로 나올 대우조선해양도 매력적이지만 경쟁이 워낙 치열할 것으로 보이는데다 대우건설 매각 작업에 감점제도를 도입했던 자산관리공사(캠코)가 대주주여서 같은 아픔을 다시 겪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재계 관계자는 "변수가 많은 M&A 시장에서 영원한 승자는 없는 게 아니겠느냐"면서도 "M&A를 주요 성장전략으로 삼아온 기업들인 만큼 지금의 시련은 한 단계 성숙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유창재 기자 yooco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