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조원들이 오죽하면 위험을 무릅쓰고 6층 배관을 통해 탈출했겠습니까."

21일 새벽 포스코 본사 농성장을 이탈한 과격 노조원들을 체포해 조사하고 있는 한 경찰은 "노조원들의 말을 종합해 보니 포스코 본사 농성장은 사실상 지도부의 '노동 독재'가 판을 쳤던 곳이었다"고 말했다.

노조원 중 대다수는 빠져나오고 싶어도 노조 집행부가 무서워 탈출하지 못했다고 답변했다.

일부 노조원은 길목 길목을 파이프를 들고 지키는 강성 노조원들을 피해 배관 구멍이나 엘리베이터 내 밧줄 또는 건물벽 배관 등을 타고 기어 내려왔다고 털어놓았다.

노조원 김모씨(50)는 이날 "생지옥이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노조 지도부를 따르면 일자리를 끝까지 보장받을 수 있다는 한가닥 믿음 때문에 9일간 버텼는데 한 가지도 얻은 게 없이 끝나 허탈할 뿐"이라며 지도부를 원망했다.

지도부의 지시를 어길 경우 공사 현장에 더 이상 투입될 수 없을 것 같아 협상 당사자도 아닌 포스코 본사를 불법 점거하는 데 동참했다는 진술도 많았다.

노조원들은 점거기간 중 컵라면과 초코파이 등으로 끼니를 때우면서 상당수는 설사 등에 시달리기도 했다.

지도부는 '아프다'며 농성장을 떠나려는 노조원을 강제로 못 나가도록 해 원성을 샀다.

이모씨(59)는 경찰에서 "일부 과격파들이 건물 한 편에 불을 질러 (점거 농성장에 있던) 2000명은 자칫하면 떼죽음당할까 봐 그동안 너무 두려웠다"고 진술했다.

지도부는 몰래 나가는 노조원들이 생기자 쇠파이프로 무장한 '사수대'와 '실천단'을 구성해 건물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길목을 지키게 했다.

이와 관련,경찰 관계자는 "20일 새벽 아래층으로 내려오던 한 노조원이 사수대가 휘두른 파이프에 머리가 찢어져 피를 흘리며 1층 로비에 서 있는 것을 목격했다는 진술도 있었다"고 밝혔다.

노조 집행부는 공사 발주업체인 포스코를 협상에 끌어내기 위해 끝까지 본사 건물에서 버텨야 한다는 목표 아래 조합원들을 통제했지만 21일 1500여명에 이르는 노조원들은 결국 집단으로 탈출했다.

이는 강성 투쟁으로만 일관한 지도부에 대한 노조원들의 대반란으로 해석된다.

여기에는 지도부가 20일 오후 8시만 해도 자진 해산 방침을 굳혔다 한 시간여 만에 돌연 결사 항전으로 급선회한 이유가 자신들에 대한 사법처리 면제 요구를 경찰이 수용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 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더구나 지도부는 조합원들을 끝까지 붙잡아 놓기 위해 자진 해산할 경우 포스코측에서 손해배상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거짓 선동까지 했다고 경찰은 밝혔다.

조합원 강모씨(49)는 "어째서 자기네들만 살려고 선량한 노조원들을 볼모로 잡아 놓을 수 있느냐"면서 "노조 지도부에 배신당한 느낌"이라고 분노했다.

노조 지도부와 폭력 가담자 등을 제외한 대다수 노조원들은 당국의 선처 방침에 따라 별다른 사법 처리를 받지 않겠지만 집행부를 믿고 농성에 참여한 책임에서는 벗어날 수 없을 전망이다.

포스코측이 2000억원으로 추정되는 손해배상 청구를 적극 고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 노조원들도 가담 정도에 따라 엄청난 재산상 손실을 입어야 할 처지다.

이에 따라 포항건설노조 지도부와 노조원들 간 불신의 장벽이 더 높아져 사실상 조직은 와해 과정을 거칠 것으로 보인다.

1989년 4월 민주노총 산하로 설립된 포항지역 건설노조는 원청업체인 포스코건설과 용역 계약을 맺고 있는 기계(33개사) 전기(30개사) 철근·목공(7개사) 협의회 소속 사업장에 근무하는 3000여명의 조합원을 거느리고 있다.

포항=하인식·이태훈 기자 hai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