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당수 미국 기업들이 3개월에 한 번씩 자체 분기 실적 전망을 발표한다.

그 때마다 해당 기업의 주주들은 물론 월가의 애널리스트와 펀드매니저들도 이해 득실을 따지느라 여념이 없다.

유럽에선 좀처럼 보기 드문 이 같은 풍경은 불과 몇 년 전까지만해도 주주 중시 경영을 최우선으로 하는 미국식 자본주의의 상징으로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에는 최근 분위기가 달라졌다.

기업이 단기 실적 전망을 맞추는데 급급할 경우 장기적인 기업 가치와 지배 구조가 훼손될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면서 부작용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커진 것.

이 같은 분위기를 반영하듯 미국 기업들과 애널리스트 등은 24일 기업의 분기실적 전망 발표를 중단해야 한다고 공동으로 요구하고 나섰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이날 미국 내 160개 주요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로 구성된 비즈니스라운드테이블과 8만여명의 애널리스트 및 펀드매니저로 구성된 공인재무분석가(CFA)협회는 이 같은 내용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는 10개월간의 논의를 토대로 작성됐으며 논의 과정에는 규제 당국도 참여했다.

보고서 작성을 주도한 소매업체 오피스 디포의 스티브 오들랜드 CEO는 "주당 순이익 전망치가 몇달러 몇센트 인가로 기업의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없다"며 "그럼에도 분기 실적 전망이 발표되고 나면 모든 관심이 거기로 쏠리고 만다"고 지적했다.

실제 한 연구팀이 최근 400명의 CEO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응답자의 80% 이상이 단기 실적 전망을 맞추기 위해 연구개발(R&D) 등 장기성장에 필수적인 투자를 줄일 수 있다고 답했다.

또 50% 이상의 응답자가 장기적인 기업가치를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분기 실적 전망을 위해 신규 사업을 미룰 수 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비즈니스라운드테이블의 딘 크레메이어 집행이사는 "단기 실적 전망에 대한 집착은 주주들에게 이롭지 않으며 많은 경우 주주가치를 훼손한다는 점을 잘 보여주는 조사 결과"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엔론 월드컴 등의 대규모 분식회계도 경영진이 단기 실적 전망을 맞추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과정에서 비롯됐다고 지적했다.

이 같은 부작용을 이유로 씨티그룹 화이자 인텔 제너럴모터스(GM) 코카콜라 구글 등은 이미 분기 실적 전망 발표를 중단한 상태다.

대표적 장기투자자인 워런 버핏도 기업들이 장밋빛 분기 실적 전망을 내놓고 이를 맞추기 위해 무리하는 것에 대해 '위험한 줄타기'라며 비판하고 있다.

이에 따라 분기 실적 전망을 제공하는 미국 상장기업도 2003년 75%에서 현재 50% 정도로 크게 줄었다고 전미IR협회는 밝혔다.

그러나 상당수 기업들은 분기 실적 전망을 중단할 경우 시장의 신뢰를 잃고 주가가 급락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여전히 이를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

또 자금력이 취약한 중소기업이나 첨단업종에 속한 기업들은 실적 전망을 제시하지 않으면 증시에서 자금을 조달하기가 힘들어질 수 있다며 난색을 표하고 있다.

주용석 기자 hoho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