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대리운전을 하는 윤 모씨(41·여)는 요즘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영세민 전세자금대출을 받아 전셋집을 구하려고 했지만 은행에서 대출을 거부당했기 때문이다.

윤씨가 살고 있는 월세방의 임차 계약이 9월에 끝나 하루빨리 거처를 알아봐야 할 상황이다.

은행 측은 윤씨의 남편이 과거 사업을 하는 형의 대출 보증을 서 줬다가 빚을 져 법원에서 개인파산을 선고받은 전력을 문제 삼았다.

윤씨는 1일 "남편은 채무 면책을 선고받았고 나는 신용 상태에 문제가 없는데도 대출이 불허됐다"며 "정부가 서민 주거 안정을 위해 실행하고 있는 전세자금대출마저 받을 수 없다니 어이없을 뿐"이라고 한탄했다.

법원으로부터 파산 면책을 선고받은 채무자들에 대한 차별과 불리한 처우가 계속되면서 당초 과중채무자의 재기를 돕겠다는 파산제도의 취지가 빛을 잃고 있다.

면책을 받은 이들이 당하는 차별은 은행 대출 거부뿐만 아니다.

회사원 김 모씨(38)는 최근 초등학교 4학년인 딸 앞으로 보장성 보험을 들어주려 했으나 보험사로부터 가입을 거절당했다.

김씨 역시 개인파산을 했던 '과거'가 문제됐다.

그는 "한때 파산할 정도로 빚에 시달렸지만 지금은 월 4만원짜리 보험에 가입할 형편은 된다"며 "보험 가입에서마저 파산면책자를 이처럼 괄시하니 면책 받아본들 무슨 소용이 있냐"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외에 불법 채권추심과 취업시 차별,휴대폰 등의 할부거래 제한 등 면책자들의 정상적인 경제생활과 재기를 방해하는 걸림돌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면책자들은 최근 이 같은 사례를 모아 집단소송까지 준비하고 있다.

인터넷 다음 카페의 면책자클럽(cafe.daum.net/pasanja)은 현재 면책자들이 경험한 다양한 차별 사례를 모으고 있다.

이 카페의 회원들은 이미 세 차례에 걸쳐 청와대와 재정경제부 등에 파산자에 대한 각종 차별과 불이익을 없애 달라며 집단 민원을 제기한 바 있다.

카페 운영자 허 모씨(39)는 "거듭된 민원에도 불구하고 관계 당국은 적절한 대책을 내놓지 않고 있다"며 "이번 달 말까지 답변을 기다려 본 뒤 끝내 만족할만한 반응이 없을 경우 소송을 제기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이재권 변호사는 "대출 등 금융거래에서 일정한 제약을 가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으나 면책자에 대해 7년간이나 대출을 금지하고 있는 현행 은행연합회 규정은 선진국과 비교해 가혹하다"고 말했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판사는 "미국에서는 고액 채무자가 파산 신청을 하면 그 순간부터 채권 추심이 금지된다"며 "우리나라는 이에 대한 명문 규정이 아직 없어 면책자들조차 자신이 빚을 갚아야 하는 것으로 잘못 아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한편 대법원에 따르면 법원에서 면책 선고를 받은 채무자들의 수는 2002년 317명에서 지난해 1만6759명으로 크게 늘었다.

올 상반기에만 4만9000여건의 개인파산 신청이 법원에 접수된 데다 법원의 면책 선고율이 95%를 넘는 점을 감안하면 앞으로 면책받는 채무자의 수는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유승호 기자 ush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