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봄,당시 서울 장충동에 있던 청어람 사무실에 봉준호 감독이 최용배 대표를 만나기 위해 찾아왔다.

봉 감독은 '네스' 호수에 나온다는 전설 속의 괴물 '네씨'를 한강변 63빌딩과 합성한 사진을 보여주며 최 대표에게 말했다.

"한강에서 이런 괴물이 튀어나오는 겁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만들어보고 싶었던 영화라는 봉 감독의 설명이 이어졌다.

2000년대 초부터 봉 감독과 같이 영화를 해보기로 약속했던 최 대표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한번도 해본 적 없는 괴수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막막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돈도 많이 들 것이 뻔했다.

하지만 최 대표는 "우리나라도 현란한 컴퓨터그래픽(CG)이 동원되는 영화를 얼마든지 잘 만들 수 있다"는 봉 감독의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특수효과는 경험 많은 외국의 CG팀을 쓰면 된다는 판단도 섰다.

며칠 후 봉 감독과 다시 만난 자리에서 최 대표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래,봉 감독.괴물은 어떻게 생겼지?"

이렇게 해서 제작자 감독 주연배우(괴물)가 드디어 한자리에 모였다.

봉 감독이 '살인의 추억'을 성공적으로 끝낸 뒤 2004년 말부터 '괴물'의 제작 준비가 시작됐다.

투자자를 구하는 일이 가장 큰 숙제였다.

"다른 영화와는 달리 괴물은 캐릭터 모델링 작업에 초기 비용이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청어람의 자체 투자만으로는 이를 감당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최 대표는 투자자를 찾으러 동분서주했지만,아직 실사 촬영이 시작되지도 않은 영화에 선뜻 돈을 내놓을 이는 많지 않았다.

더구나 한국영화에서는 거의 시도된 적이 없는 대작 괴수 영화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큰손'들이 투자 약속만 하고,이른 투자는 꺼렸다.

'CG가 깔끔하게 잘 나오는지 보고 투자해도 늦지 않다'는 판단이었던 것.

이대로 두면 제작 일정에 차질이 생길 것은 불보듯 뻔했다.

국내에서 펀딩이 어렵자 최 대표는 일본으로 향했다.

수출계약을 맺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일본에서는 '봉준호' 하면 이미 '살인의 추억'의 감독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일본에서 약 32억원의 수출 계약과 15억원의 직접 투자를 끌어냈다.

그런데 이번엔 디지털작업에 문제가 생겼다.

괴물 캐릭터 입체 스캐닝을 끝낸 뉴질랜드의 '웨타'사가 디지털작업을 더이상 못하겠다고 나온 것.최 대표는 웨타사가 '반지의 제왕'으로 유명세를 타기 전에 이미 30억원에 후반부 작업까지 계약을 마쳐 둔 상태였지만 몸값이 오르자 '배째라'는 식으로 버틴 것이다.

"대금을 70억원으로 올려주든지 아니면 자기네가 못하겠다는 식으로 나오니 어쩔 수가 없었죠."

다른 회사를 물색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미국의 유명 CG사들은 한국의 작은 영화사의 요청에 가타부타 대답도 없었다.

다행히 미 오퍼니지사에서 일하는 한인 디자이너들과 선이 닿았고,이들이 회사를 설득해 '괴물'의 디지털작업을 마무리해줬다.

합성 장면 촬영 때는 미 CG 제작사의 스케줄에 국내 촬영의 모든 일정을 맞춰야 했다.

"컴퓨터로 만들어지는 괴물의 스케줄에 제작 스태프는 물론이고,천하의 송강호도 꼼짝없이 맞춰야 했습니다.

이번 영화는 괴물이 실제로 주연이었던 셈이죠."

차기현 기자 khc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