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찬 한국경제학회장(서울대 교수, 전 서울대 총장)은 9일 이 학회가 주최한 국제학술대회 개회사에서 한·미 FTA와 관련해 "자유무역의 이상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부작용을 가볍게 여겨 협정 타결을 재촉하고, 현실의 어려움에만 친숙한 사람들은 자유무역이 가진 원론적인 장점을 충분히 평가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부의 정책은 이상과 현실을 조화시키고 장기적 이익을 지향하되 단기적인 부작용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 중용의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완벽에 가까운 말이다. 그러나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와닿질 않는다. 정부가 부작용을 감안해 한·미 FTA 협상을 제대로 하라는 얘기인지, 아니면 한·미 FTA를 지금 추진해선 안된다는 얘기인지 알 수가 없다.

정 교수의 발언이 관심을 끄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한국에 경제학맥이 있다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이른바 조순·정운찬 학맥이다. 그만큼 국내 대표경제학자로서 이들의 학계 영향력은 크다. 뿐만 아니라 조 교수의 경제학원론을 통해 처음으로 경제학을 접했던 사람들은 물론이고 이들의 지명도나 그간의 위상으로 보아 일반인들에 대한 영향력 또한 지대한 게 사실이다.

조 교수와 정 교수는 한·미 FTA의 '졸속 추진'에 반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본인들의 의도야 어떻든 이는 한·미 FTA 반대 쪽에 힘을 실어주는 결과가 됐다. 실제로 얼마전 한국사회경제학회 소속 교수 등 경제학자 151명이 한·미 FTA 협상 중단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한 자리에서 '정운찬 서울대 총장과 조순 전 부총리까지 한·미 FTA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나섰다는 것은 의미있는 것'이란 평가가 나왔다. 반면 한·미 FTA를 지지하는 사람들 중에는 적잖이 곤혹스러웠다거나 헷갈린다는 얘기들이 흘러 나오고 있다. 조순, 정운찬 교수라면 한·미 FTA에 반대하는 게 전혀 이상할 것도 없는 그런 학자들과는 다른 부류로 인식돼 왔던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실 한·미 FTA의 '졸속 추진'에 찬성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중요한 건 그걸 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정 교수는 한·미 FTA가 위험해 보인다는 말도 했지만 다른 인터뷰에서는 "경제학자로서 이론적으로 한·미 FTA에 반대할 명분은 없다. 그러나 시간표를 짜두고 협상을 하면 우리에게 굉장히 불리하게 될 것"이란 말도 했다. 이것만 보면 정 교수가 한·미 FTA 자체를 반대하는 것 같지는 않다.

한·미 FTA의 '초고속 추진'에 반대한다고 말한 조 교수의 주장 또한 자세히 뜯어보면 방점은 FTA 그 자체에 있는 게 아니란 느낌이다. 노사문제 투자부진 교육부실 등 정작 우리 내부에서 스스로 경제성장의 기본을 무너뜨려 놓고선 정부가 한·미 FTA가 만병통치약인 양 들고 나오는, 한마디로 우선순위 설정이 잘못됐다는 지적을 하려 했던 것 같다.

지금의 우리 사회는 찬성, 반대로만 나누어져 메시지 전달 자체가 어려운 상황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이럴 때 경제학자들의 역할이 절실하다. 헷갈리는 국민들은 정치논리가 아닌 경제논리를 듣고 싶어 하고, 선택에 따른 대가가 무엇인지를 알고 싶어 한다. 정치에 때묻지 않은 경제학자들의 솔직하고, 분명한 목소리가 아쉬운 때다.

논설위원·경영과학博 a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