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영 < 생활경제부장 >

명품사기극을 벌이는 일은 손바닥 뒤집기처럼 쉬웠다.

국산과 중국산 부품을 얼버무린 싸구려 손목시계가 최고 1억원 가까운 명품시계로 둔갑된 과정은 허무하기조차 했다.

시계 판에 그럴 듯한 문양을 새겨 넣고는 '영국 왕실사람들이 애용하는 명품'이라는 입소문을 내는 것으로 충분했다.

청담동의 한 바에서 러시아 무희 등을 동원해 연 '신제품 설명 라이브 쇼'에 400여명의 부유층 인사들이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루기도 했다.

"값은 비싼데 디자인이 엉성한 것 같다"는 일부의 수군거림은 행사에 참석한 인기 연예인 등 참석자들의 면면에 금세 묻혀버렸다.

인기 개그맨 아무개가 찼고,여배우 아무개가 애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사기극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이었다.

'한정 제작품'이라는 '빈센트' 손목시계를 몇 달 기다려서라도 사고야 말겠다는 예약구매자들이 줄을 섰다.

2006년 여름,한국의 '피프스 애브뉴(Fifth Avenue·뉴욕 맨해튼의 명품거리)'라는 서울 청담동에서 벌어진 사기극은 안 그래도 후텁지근한 올 여름을 더욱 짜증나게 만들었다.

사기당한 사람들의 면면을 거론하며 '고소하다' '쌤통이다'는 일부의 반응도 없지 않지만,그런 식의 가십으로만 흘려버리기엔 짚어봐야 할 게 너무 많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를 휩쓸기 시작한 '명품 신드롬'은 많은 사람들에게 '허장성세(虛張聲勢)'의 다른 개념으로 받아들여진지 오래다.

그럴 만한 경제력을 갖춘 소수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고급스럽되 품질과 기능,내구성도 뛰어난 최상급 제품'이라는 명품에 대한 풀이는 적어도 다수 한국인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옆집 아무개가,친구 누구누구가 들고(혹은 차고) 다니니까 빚을 내서라도 장만해 폼을 잡아야 하는 그 무엇'이 명품의 한국식 정의(定義)가 됐다.

명품의 대명사로 통하는 루이뷔통이 본고장인 프랑스에서는 판매대리점이 몇 안 되고,그나마도 장사가 안돼 문을 닫을 지경에 빠졌다는데 한국에서는 없어서 못 파는 지경이다.

심지어 'A급 짝퉁'을 사기 위해 여고생들이 계를 들고,초등학생들은 10만원이 넘는 '루이뷔통 헤어밴드'로 머리를 치장하고 과시하기 바쁘다는 얘기까지 나돈다.

사회의,시대의 속이 공허할수록 겉치장 문화가 판을 친다는 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역사가 일깨워주는 바다.

쓰면 쓸수록 빛을 발하고,쓰는 사람과 만든 이의 마음이 하나가 돼 진가를 발휘하는 예술품으로서의 명품문화가 한국에서는 시궁창에 처박혀진 채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강남 일대의 전당포들이 '중고명품거래소'로 재미를 볼 수가 없다.

한국에서는 명품 브랜드도 유행 주기가 대단히 짧고,그 유행에 조금이라도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 갖고 있는 '헌 명품'을 전당포에 팔아치우고 '새 명품'을 사들이는 사람들로 넘쳐난다는 대목에 이르면 할 말을 찾기 힘들어진다.

시장경제 사회에서 자신의 필요와 구매력에 맞춰 고가·고급제품을 소비하는 것은 탓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시장에 돈이 돌게 하고,기업들로 하여금 끊임없는 품질·디자인 향상에 주력하게 하는 자극제로 작용한다.

하지만 맹목적인 '쩨(製)' 콤플렉스까지 더해진 허영적 소비문화의 만연은 진정한 장인정신으로 무장한 우리 기업들의 경쟁력있는 제품 개발 욕구까지 멍들게 한다.

'빈센트' 사기극은 빗나간 한국인들의 소비문화에 경종을 울려줬다.

ha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