梁奉鎭 < 비상임논설위원·YSK 대표 >

서울의 한 경영대학원을 책임지고 있을 때다.

내가 사외이사로 있던 주택공사의 한 임원이 "학교로 찾아오겠다"고 전화를 걸어왔다.

"(주택공사가 있는) 분당에서 서울까지 오려면 시간낭비가 많을 테니 전화로 하자"고 했더니 굳이 꼭 "직접 만나 상의해야 할 일이 있다"고 했다.

당시 주택공사는 사장을 공모(公募)하고 있었다.

사장을 뽑자면 추천위원회를 구성해야 하고 그중 몇 사람은 외부에서 수혈을 해야 했다.

주택공사는 크게 보아 집 지을 땅과 돈을 어떻게 마련하는가가 주요과제다.

땅 문제는 어차피 정부가 풀어야 하는 일이고 보면 좋은 자금을 값싸게 끌어올 수 있는 능력이 관건이라면 관건이다.

주공 이사회는 이런 면을 잘 평가할 수 있는 위원 한 사람을 사장추천위원회에 포함시켰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그런 맥락(脈絡)에서 나는 당시 금융관계 연구원장을 하고 있는 친구 하나를 추천했더니 다들 좋겠다고 했다.

이사회가 끝나고 추천된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이러저러해서 주택공사 사장추천위원이 되었으니 도와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그런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다"고 손사래를 쳤다.

이사회에서 이미 결론이 난 일을 번복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어서 "내 체면을 생각해서 한번 봐달라"고 읍소했더니 마지못해 승낙했다.

학교로 나를 찾아온 주공 임원의 사정은 딱했다.

"사장 추천위원 명단을 청와대에 들고 갔더니 K고등학교 출신이 너무 많다"며 "조정하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다른 K고 출신위원은 당연직으로 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내가 추천한 인사를 빼라는 지시와 같은 것이었다.

우스꽝스러운 일은 당시 그 명단에 있던 K고 출신 위원은 몇 명 되지도 않은 반면 거의 대부분이 S대 출신이었다.

"K고 출신이 너무 많아 안 된다면 S대 출신은 왜 트집 잡지 않는 것이냐"고 따져 묻자,그 임원은 그저 멋쩍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싫다는 감투를 억지로 씌워 놓았다가 이번에는 "없던 일로 해달라"며 도로 빼앗을 수밖에 없는 기막힌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오히려 잘 됐다"는 친구의 넓은 이해심 때문에 난국을 벗어날 수는 있었으나 두 번에 걸친 결례(缺禮)는 지금도 빚으로 남아 있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뽑힌 사람이 현재 주택공사의 한행수 사장이다.

그가 노무현 대통령의 부산상고 선배이고 열린우리당 재정위원장을 지냈다는 운명적 인연은 자산이자 동시에 부채로 작용하고 있다.

하지만 당시 주공 주변 사람들은 "아주 좋은 분(長)을 모셔왔다"고 입을 모았다.

그는 숫자에 밝을 뿐 아니라 민간기업에서 잔뼈가 굵은 삼성 CEO 출신이다.

나라 안팎 사정에도 밝고 인품도 단정 깔끔하며 주택공사보다 더 큰 자리를 맡겨도 모자람 없는 인물이라고 평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청와대가 벌인 코미디 수준의 처리방식이 오히려 그를 역차별 받게 하거나 시장가치를 떨어뜨린 요인이었다는 것이 주변의 평가였다.

국민의 눈엔 그 중요성에 있어 장관과 공기업 사장에 차이가 있을 수 없다.

청와대가 문화부차관, 교육부장관,헌재(憲裁)소장을 지명하면서 위에서 점찍어 내려 보내는 '내식대로'인사를 결행한 것처럼 공기업 사장도 그런 식의 '하방(下方) 지명'형태를 취했다면 오히려 일관성이라도 있다는 소리를 듣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여기서는 '내 멋대로 하방', 저기서는 '위장된 추천'방식을 연출하는 것은 너무나 속보이는 일이다.

더욱이 청와대는 '큰 일'을 해야 하는 곳이다.

신문에 실리는 기사에 하나하나 토를 달고, 친인척 연루설에 해명을 하느라 바쁘고, 공기업 사장을 추천하는 위원들까지 일일이 가부(可否) 표를 찍는 것은 '사단장이 보초를 서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는 나라의 운명이 어둡다.